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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냉이와 옥수수
인간문화재 ‘온달 김준호’와 ‘평강 손심심’의 재피방(이야기방)
 
UWNEWS 기사입력  2021/11/23 [15:40]

 

김준호는 18세에 춘당 김수악 명인을 은사로 소리와 악을 배웠으며, 상징민속학을 전공했다. 해병대 484기이며, 2014년 1월 1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4호 국내 지신밟기 예능 보유자로 선정되어 인간문화재가 됐다. 

손심심은 17세에 문장원, 양극수, 김동원 명무를 은사로 동래양반춤, 동래할미춤, 동래학춤을 시작하였고, 전통무용을 전공했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동래야류 전수조교이고 동래학춤 이수자이다. <편집자주>

 

  11살 남짓의 우리는 한참 마을 도서관에서 ‘로빈슨 크루소, 보물섬, 톰 소여의 모험, 피노키오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섭렵했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같이  우리만의 은밀한 비밀 공간이 절실했다.

 

우리는 방학 첫날부터 각자 가지고 있는 낫으로 강가  숲의 아까시나무를 쳐서, 숲속의 비밀 공간인 ‘본부’를 만들었다. 누가 본부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나무를 엮어 작지만 튼튼한 움막을 만들고, 그 위에 넓은 나뭇잎을 덮어서 소낙비가 와도 물이 안 새는 훌륭한 비밀 본부를 완성하였다.

 

  이 본부는 여름 한 철 우리들의 공간으로, 소를 먹이러 나오면 거기서 낮잠도 자고 만화책도 보고, 비를 피하기도하는 근사한 아지트였다. 구운 감자로 점심을 때운 우리는 소들을 그늘과 물가로 몰아놓아 낮잠을 재우고 알몸으로 강에 뛰어들었다. 헤엄은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도 없지만, 겁도 없이 몇 질씩 되는 데서, 고기도 잡고 물놀이도 하며 그렇게 신나게 놀았다.

 

  팬티라도 제대로 입은 아이들이 한 둘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으니, 수영복은 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냥 알몸이라도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이 깨 벗고 놀았다. 오후 3시 삼천포행 기차가 지나갈 때쯤까지 놀다가, 물에서 나온 우리는 입술이 시퍼레져서, 그 길로 알몸으로 또 불을 피웠다. 바로 새참으로 강냉이를 구워 먹기 위해서였다.

 

  강냉이는 감자같이 멀리 안데스가 준 또 하나의 선물 이었다. 긴 수염에 모시 두루마기를 걸치고 뙤약볕에 위엄있게 서 있는 강냉이 때문에, 그때 여름은 참 달콤했었다. 어릴 때 우리는 강냉이라는 말을 ‘옥수수’보다 많이 썼다. 강냉이는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군대에 의해 조선에 들어왔다. 중국 강남에서 들어왔다고 ‘강남이’라고 하다가 ‘강냉이’로 정착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강냉이는 촌 말이라고 표준말이라며 옥수수라는 말을 처음 배웠는데, 이름 그대로 옥구슬이 달린 것 수수라고 ‘옥수수’라고 불렀다. 재배 기간이 짧고 아무 데나 심어도 가리지 않고 잘 자라고, 내버려 두어도 잘 커서, 특히 척박한 강원도 산간에서 많이 키웠다. 그래서 아예 이름을 ‘강원도 강냉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두메산골 처녀들은 쌀  한 말을  못 먹고 시집간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강원도 산간에서는 쌀 못지않은 귀한 곡물이었다.

 

“사절치기 강냉이밥으로는 오골박작 끓는데 임자당신 어딜 갈라구 신발단속 하시오.

이밥에 고기반찬은 맛을 몰라 못 먹나 사절치기 강냉이밥도 마음만 편하면 되지요”

-정선아리리 중에서-

 

 

 

  옥수수는 한 알을 심으면 예닐곱 개씩 열매가 달리는데, 알 수로 치자면 몇백 배를 수확하는 셈이라서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세계 최고인 곡물의 왕이었다. 거기에다 생 옥수숫대를 잘라 질겅질겅 씹으면 사탕수수같이 단물이 나와 사람이든, 소든 여름의 인기 간식이었다.

 

  노란 강냉이, 붉은 옥수수, 흰 옥수수에 작대기를 끼워 불에다 돌려서 구워 먹으면, 톡톡 터지는 달직한 향과 쫄깃하고 고소한 그 맛에 우리는 그저 행복했다. 물론 매일 그것만 먹은 것은 아니었다.

 

  각자 집에서 몰래 가져온 쌀로 우량아가 그려진 남양 분유 깡통에 밥을 지어 먹기도 하고, 천렵을 해서 은어와 피라미를 잡아 매운탕도 끓여 먹기도 했다. 어쩌다 한 번씩 특공대를 조직해서 남의 집 밭에서 한 뼘도 안 되는 고구마와 콩, 오이, 가지 등을 서리해서 먹기도 했다.

 

  옷은 꼬질꼬질하고 땀내가 진동하고,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리고 입가가 시꺼멓게 변해도 우리는 겁내지 않았다. 옷 입은 그대로 강에 뛰어들어, 옷도 몸도 그렇게 씻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지치면 나무 그늘서 낮잠을 잤다.

 

  고추잠자리가 눈과 코를 간지럽히고 진주행 오후 5시 기차가 철길을 달릴 때면, 우리는 낮잠에서 한두 명씩 깨어났다. 그리고 제일 먼저 제집 소가 잘 있는지 확인을 했다. 무엇을 하고 놀든지, 무엇을 먹든지 상관없었다.

 

  제집 소를 잘 지키고 배불리 먹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로 무거운 책임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레이더는 항상 소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낮잠 잔 사이에 우리 소가 남의 집 밭을 짓밟고 있지 않은지, 농작물을 뜯어먹고 있지 않은지 잘 지켜야 했다.

 

  최악의 사태는 소를 잃어버리는 경우였다. 만약 소를 잃어버리면 일단 아버지로부터 상상도 하기 싫은 매타작을 당해야 했다. 만약에 날은 저물어 점점 캄캄해지는데, 아무리 불러도 우리 집 소만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인다면, 눈앞이 아득해지고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인생 최악의 난관을 경험해야 했다.

 

  그 소를 찾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밤새도록 손전등을 들고 강과 벌판을 헤매고 다니며 난리를 쳐서 소를 찾아야 했다. 그 최악의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제법 오후부터는 소를 몰고 좋은 풀밭을 찾아다니며 배가 불룩하도록 꼴을 먹였다.

 

  그리고 내일 아침을 위해 꼴망태 가득히 서툰 낫질로 소가 좋아하는 꼴들로 망태를 잔뜩 채웠다.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선이었다. 해가 버드내 쪽에 걸리면 배부른 소를 앞세우고 낫을 꽂은 제 몸만 한 꼴망태를 짊어지고 의기양양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놀고먹고 한 일밖에 없지만, 온갖 피곤한 기색을 다 내고 가족 공동체에서 나도 한몫을 했다는 것을 으스대었다. 마당 한쪽 한뎃부엌에 국수를 삶고 있고, 평상에 저녁상이 차려지고 모캣불 쑥 내가 마당에 낮게 깔렸다.

  어머니는 “우리 아들 욕봤다”라며 큰 양푼에 국수를 산더미같이 담아주셨다. 아버지는 이발소집 아들이 월남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한턱을 낸다고 출타를 나가시고, 어머니와 할무니는 밤마실을 가셨다. 평상에 모기장을 펴고 노란 강냉이를 물고, 목침 위에 누웠다. 오늘 드디어 범인이 잡히는 ‘법창야화’를 들어야 되는데, 금성라디오가 밧데리를 지고 북두칠성 쪽으로 자꾸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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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1/23 [15:40]  최종편집: ⓒ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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