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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교육
브레이크
기사입력: 2005/12/12 [17:21]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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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도 건영화학 대표

 오래전 이야기다.
 
브레이크가 고장난줄 모르고 승용차를 몰고 언덕길을 내려가다가 혼쭐이 난적이 있다.
 
절반은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다고 할까. 한참이나 지난 일인데도 가끔은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지워야 할 추억이다.
 
제어할 장치가 고장 났다는 것, 그것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하기 힘든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 TV를 켠다.
 
여기저기에서 고장 난 세상의 함성들이 귓전을 찢을 듯 파열음으로 들려온다.
 
볏가마를 국회 의사당인가 어디에 쌓아둔 거기에서 불길이 솟아오른다.
 
행정도시가 충청도 땅으로 옮겨간다 해서 서울의 책임 있는 누군가 또 가슴에 띠를 두르고 목청을 높인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입장을 표현하는 행위라서 이해하는 데는 시간도 걸릴뿐더러 조금은 어리둥절할 때도 있다.
 
TV를 켜면 우리사회가 어수선 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지. 옳고 그름에 대한 의미는 없다,
 
이쪽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이 마땅하고, 저 편말을 들으면 또한 그것이 옳은 듯도 하다. 세상이 바보로 만드는가 아니면 내가 바보인가.
 
분명한 것은 어느 한쪽이 옳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옳은 쪽에서 옳지 못한 편을 향하여 이해시키거나 설득하는 수고는 아끼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약한 자 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다소 무리(?)한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서러울 때 울게 되듯이, 억울할 때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게 되듯이 말이다.
 
때로 마음으로라도 편을 들어주고 싶어도 그 내용들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그래서 작은 아픔이 무기력한 가슴에서 슬픈 소리를 내며 새어나온다.
 
나는 이미 이만치 먼 길 걸어왔으니 어딘가에 도달할 시간이 많지 않기에 다행. 하지만 어린 아이들을 보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따뜻한 가슴으로 악수하고 웃으며 해어지고, 그러고 다시 만나고 싶고 그런 세상이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일부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버스 터미널 한켠에서 심장병 어린이 돕기 캠페인이 벌어져 어떤 이가 슬픈 곡조로 외치는 목소리가 을씨년스러운 초겨울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본다. 오천 원짜리 한 장 함속에 집어놓고 돌아서는 발길이 그래도 흐뭇해진다. 몇 걸음을 못가서 또 삐딱한 생각이 고개를 든다. “험한 세상 뭐 하러 태어났노?”
 
“누가 나고 싶어 태어났나!”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한다. 성탄절이 가까워 오는지 창문을 활짝 내리고 달리는 젊은이의 자동차에서 캐럴이 굉음을 낸다.
 
“저 혼자나 듣고 말일이지 뭐하러 저렇게 크게 틀고 다니노!” 또 속에서 꼬움이 고개를 든다.
 
세상이 모두 조금씩 나사가 풀린 듯도 하고, 그래서 브레이크가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큰일인데 말이다.
 
윗사람이 있어야 하고, 판단을 결정, 집행하는 관가가 있어야 하고, 가정에는 호통 지르는 할아버지가 있어야 하고 양심을 찌르는 목사님이나 스님이 있어야 하고, 힘겨워 할 때 내밀어주는 따뜻한 엄마의 손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준엄하게 꾸짖는 스승이 있어야 한다. 잘은 몰라도 나는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여러분들은 어떤지 나는 잘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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