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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근
MISS HELLEN
기사입력: 2017/05/25 [18:50]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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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근 전 울산시인협회장/수필가     ©UWNEWS

 지난 가을 중순쯤으로 기억된다. 울산 성남동 번화가에 있는 파리바게트 집을 막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마주쳐 들어오는 손님과 맞부딪쳤다.


“미안합니다. 죄송해요.” 하며 옆으로 물러서며 다시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 태극기 참 멋져요.”라고 했다. 순간 비켜 지나려다가 그 자리에 발걸음을 멈춘 채 얼굴을 쳐다보니 벽안의 파란 눈 서양 아가씨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말 표현이 조금 서툴게 들렸다.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하며 태극기가 멋지다는 말이 궁금해 아가씨에게 되물었다.


“아가씨, 태극기가 멋지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아가씨는 환하게 웃으면서 선생님의 양복 옷깃에 꽂은 태극기가 새겨진 뱃지가 너무 멋져 보인다고 했다.

 

나는 그 아가씨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더니 주저없이 응했다. 조금 전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이 태극기 뱃지가 맘에 들면 선물하지요.” 하고서 옷깃에 꽂인 뱃지를 뽑아 아가씨의 상의 옷섶에 꽂아주었다.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하며 한국을 좋아해서 한국에 유학을 왔고, 지금은 영어강사로 울산의 R중학에 출강한다고 했다.


건네준 태극기 문양이 또렷한 뱃지를 만지작거리던 아가씨는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에 유학 온 동기를 스스럼없이 이야기 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듣고는 텍사스 주에 살던 할아버지는 유엔군에 자원해 한국 전쟁에 참여했다.

 

밀고 밀리던 죽음의 피비린내 나는 강원도 화천 어느 산간 전장에서 적의 포탄 파편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후방 병원으로 후송되어 겨우 생명을 건진 할아버지는 다음해 5월 경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본국에서 오랜 병원생활을 하면서도 늘 한국에서 싸우던 전우들을 생각하며 다시 한국을 오고 싶어 했다.

 

어릴 때부터 한국전쟁 이야기를 기회 있을 때마다 들려주셨고, 총탄이 빗발치던 그 곳 전쟁터를 가보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도 피난민들의 행렬 속에 어린 아이들이 굶주림에 지쳐 기진맥진한 모습을 떠올렸다. 부모형제의 손에 이끌려 가던 행렬을 가슴 아파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던 할아버지는 이따금씩 소중하게 간직해 둔 훈장과 태극기를 꺼내어 보시면서 아주 귀하게 갈무리해야 한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던 할아버지는 끝내 한국을 다시 와 보지 못하고 1995년 경 세상을 하직했다고 했다.


이야기를 마친 아가씨의 눈가에는 어느 사이 눈물이 촉촉이 젖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 찡하게 6.25전쟁의 참상이 떠올랐다 벽안의 푸른 눈 낯선 UN군군인 아저씨들이 기억 속에서 하나 둘 되살아났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남의 나라 전장에 뛰어들어 목숨 걸고 싸워준 16개국 UN군들이 분에 넘치도록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들의 부모형제들에게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인류의 평화를 위해 대가없이 목숨 바쳐 싸워준 그 고마움을 우리는 무엇으로 되갚아야 하는지 도무지 아득하기만 한 순간이었다.

 

헬렌 양에게서 할아버지의 한국전쟁 참전의 아픈 과거를 들으면서 그토록 피 흘려 싸워준 나라의 태극기를 소중히 하며 귀중한 보물인 듯 간직했음은 정말 감독적인 이야기였다.

 

그 할아버지의 유품을 소중히 여기며 할아버지가 사모하던 한국을 손녀가 유학까지 왔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런 아가씨가 내 옷깃에 매달린 태극기 뱃지를 보며 멋지다고 한 말은 할아버지가 태극기를 사랑한 마음이었다. 그 태극기 사랑이 승화되어 아가씨는 태극기 뱃지와 맞닥뜨리는 순간 “아, 멋져요.” 라고 표현했으리라.


헬렌 아가씨와 마주 앉아 시킨 도넛을 먹으면서 또 다른 이야기들을 잠시 나누었다. 졸업해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다시 한국으로 와서 직장을 구하고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인정이 많고 친절하며, 도시 주변의 산과 강과 바다가 너무 아름답고 멋지다고 표현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도 정녕 한국을 잊지 못하고 늘 다시 와보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고맙고 기특해 보였다. 대이어 한국을 찾으려는 국경을 초월한 청량한 마음씨를 가진 헬렌 양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금발도 아닌 붉은빛 어울린 모발의 단발머리를 한 텍사스 주에서 온 미스 헬렌. 그 순간은 한없이 기특하고 귀한 은인의 후손으로 느껴지며 좀 더 오래도록 함께 앉아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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