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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문수보살이 살았다 하여 문수산이 된 울산의 영산(靈山)
8부능선엔 울산, 언양 일대를 방어하던 문수산성이 있어
기사입력: 2006/07/18 [18:0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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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본지주필/시인

재물복이 있는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빌어
신격호 회장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문수사에는 발복(發福)을 기원하는 아낙들이 붐비고...
 
▲문수산 전경과 문수사 및 3층석탑    

 
범서면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문수산이다.

문수산은 청량면과 범서면, 삼남면, 웅촌면 이렇게 4개 면의 경계 위에 우뚝 서 있다.
 
문수산의 높이는 해발600m 밖에 되지 않지만 울산의 주산으로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동쪽으로 약 340m 높이인 영취산과 남쪽에는 543m 높이인 남암산이 문수산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문수산의 처음 이름은 인도 마갈타국 왕서성 부근에 있는 부처님이 설법하셨다던 영취산(靈鷲山)을 닮았다 하여 영취산이라고 불렸다 한다.
 
현재는 문수산 동쪽 봉우리를 영취산으로 부르고 있으나 신라 때는 현재의 문수산과 영취산을 함께 영취산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이산이 산세가 맑고 깨끗하여 한 때 청량산으로 부르다가 문수보살이 이곳에 살았다하여 현재의 문수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청량면도 이 문수산이 청량산으로 불릴 무렵 산 이름을 따서 청량면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 문수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범서면의 천상에서 올라가는 등산로는 호젓하고 숲이 우거져 있어 울산시민들이 이 루트를 즐겨 찾는다.
 
울주군에서는 군민을 위해 등산로 곳곳에 운동시설과 삼림욕장을 만들어 놓은 탓에 등산의 초보자이라도 지루한줄 모르고 등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문수산의 6부 능선 쯤 올라가면 속칭 '깔딱 고개'라는 곳이 나온다.
 
이곳에는 언제 부터인가  생두부 김치에 막걸리를 파는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하산하는 등산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처음엔 한, 두 곳에서 장사를 하더니 어느새 대여섯 곳으로 번져 시장이 형성된 것처럼 웅성대기도 한다. 울주군에서는 이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산을 깎아내는 등 부작용이 생기자 한동안 강제철거를 했는데 어느새 다시 이들이 깔딱 고개를 점령하여 다시 등산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허기야 이들은 생업이고 보면 쉽게 물러서지는 않겠지만 문수산을 오르는 등산객들도 산을 오르고 내려올 때 이들이 파는 막걸리를 생두부 김치와 곁들여 먹으면 피로가 싹 풀린다며 은근히 좋아하는 기색이다.
 
한동안 이들이 단속에 밀려 없을 때는 이들이 없으니까 왠지 등산이 서먹서먹한 느낌마저 든다며 서운한 표정까지 짓는 등산객들도 많았다.

이 깔딱 고개의 우측으로 돌아가면 바위틈에서 나오는 산수를 파이프로 연결해 등산객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약수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 물맛도 산새를 닮아 청아하여 등산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약수터에서 정상 쪽으로 오르다가 8부 능선쯤에 이르면 정상을 따라 두르듯이 쌓은 테뫼식 산성이 나온다. 이 산성은 성내에서 수습된 토기편과 기와파편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에 울산ㆍ언양일대를 방비할 목적으로 축조된 산성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은 자연유실로 인하여 훼손이 심하지만 자연석을 이용하여 서로 물리는 방식으로 성벽의 안팎을 모두 수직에 가까운 석벽으로 쌓았다.

현재 이 산성은 높이 50~143m 정도로 800m가 남아있다. 또한 남쪽에는 문지(門址) 시설이 서쪽에는 언양 방면을 감시하는 별도의 석축시설이 남아 있기도 하다.
 
구전으로는 이 문수산성이 '굴화산성' 이라고 전해오고 있어 굴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몰라도 문헌상으로는 이러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수산성은 울산 울주군 범서면 천상리 산153일원에 존재하며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수산의 문수암 쪽에는 300여m 규모의 바위가 둘러싸고 있다. 이 바위는 병풍처럼 문수산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여 병풍바위라고 부르는데 최근에서야 산악인들이 암벽등반의 조건을 모두 갖춘 훌륭한 암벽등반 코스로 인식하여 암벽 등반가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병풍바위는 화강암이 변성된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찰력은 떨어지나 암벽 등반에  최적의 조건인 주름이나 균열과 돌출에 의해 형성된 많은 홀드가 있어 더욱더 암벽 등반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문수산을 두고 풍수전문가들은 문수산은 울산 어느 곳에서도 보이므로 지역에 따라 문필봉과 노적봉으로 볼 수 있다면서 풍수학 상으로 문필봉은 학자와 문인, 그리고 정치인을 노적봉은 부자를 배출하는 형상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울산은 한국의 공업수도로 거듭났으며 이후락, 최형우 등의 정치인과 최현배 같은 학자와 서덕출과 같은 문인을 배출했다. 그뿐 아니라 우리나라 재계의 거두인 신격호 회장도 이곳 문수산 아래 에 있는 둔기마을에서 태어났다.

신 회장과 이곳 문수산의 문수사에는 신 회장의 출생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가난했던 둔기마을의 한 아낙이 가난이 너무 몸서리쳐져서 이곳 문수사를 찾아서 재물복이 있는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한 뒤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신 회장이라는 것이다.
 
그 후 신 회장은 재계의 거물로 성장하자 신 회장의 어머니는 이 문수암에서 불공을 드린 득에 신 회장 같은 아들을 두었다고 믿었으므로 이곳 문수사를 새로이 중수 공사를 해줄 것을 아들에게 부탁한다.
 
신회장은 어머니의 염원대로 1984년 대대적인 불사를 하여 지금의 문수사 가람형태가 갖추어졌다고 한다.

이곳 문수사는 신라 원성왕(789∼798)때 연회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문수산 아래에는 영취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이절 주위의 토굴에서 큰 스님이 숨어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이 원성왕에게까지 알려지자 원성왕은 연희스님을 국사로 봉할 것을 마음먹고 청하였으나 국사가 되는 것이 싫었던 연희스님은 암자를 떠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연희스님은 길을 가다가 한 농부를 만나게 되어 농부가 떠나는 이유를 묻자 자초지종을 밝히자 농부는 영희 스님이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며 나무랐다.
 
그럼에도 연희스님은 농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길을 재촉했는데 이번에는 불법을 능란하게 설하는 재주를 가진 변재천녀(辯才天女)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변재천녀도 연희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연희스님이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길을 떠난 것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연희스님은 처음만난 농부가 문수보살임을 깨닫고 가던 길을 돌아서 국사자리를 수락하면서 농부를 처음 만났던 자리에 암자를 지어 기거하면서 문수암이라고 불렀고 변재천녀를 만났던 자리에는 보현암을 지었다고 한다.
 
▲문수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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