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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밀가루 한 포 얻으려 도장 찍어 학살된 많은 양민들
기적적으로 살아남아도 숨어살아야 했던 어두운 시절
기사입력: 2006/07/03 [12:09]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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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주필/시인

▲ 보도연맹원들의 학살현장    © 울산여성신문

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절대 지지, 북괴 정권 절대 반대, 공산주의 배격 봉쇄, 남북로당 폭로 봉쇄 등을 목적으로 하는 반공단체
보도연맹에 관한 이승만 정부의 목적은 분명했다. 좌익들의 자진 전향을 유도했던지 아니면 유화책으로 포섭하려 했던지 간에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만든 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보도연맹을 결성하게 되었고 좌익사상을 버리고 자수하여 전향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신변보호를 약속했었다. 심지어 정부는 보도연맹에 우익관변단체까지 참여시켜 보도연맹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육성하기까지 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절대 지지, 북괴 정권 절대 반대, 공산주의 배격 봉쇄, 남북로당 폭로 봉쇄 등을 목적으로 하는 반공단체로 외견상 민간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실질상 정부기관이었다.

그러나 창설 1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정부의 태도는 돌변하여 이들을 합법적인 제판절차 없이 집단학살을 자행한 것이었다. 창설당시 가맹하면 과거의 좌익운동내지 동조를 묻지 않고 백지로 돌린다고 법무, 국방, 내무 3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직접 성명까지 발표하며 약속했던 만큼 그들이 설령 좌익분자로 당시 정부에 해를 끼친 자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처형할 근거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에게 동조할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가능성 하나만으로 무차별하게 학살을 자행한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는 없는 만행인 것은 틀림없었다.

더구나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은 좌익세력도 있었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권의 협박에 못 이겨 도장 찍은 양민들이었고 회유에 의해 가입한 사람들이 많았다. 좌익사상과는 거리가 먼 순진한 민간인들이 많이 희생된 이면에는 그 무렵 정부에서 각 읍ㆍ면으로 내려 보낸 할당제가 문제였다. 할당을 받은 읍ㆍ면에서는 숫자를 채우기 위하여 비누나 밀가루 등을 주며 양민들을 회유하여 도장을 받은 사실들이 훗날 밝혀지므로 좌익들의 처형이 아니라 양민 학살극이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6ㆍ25전쟁이 끝난 뒤에도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 사상범의 후손으로 낙인찍혀 그들의 억울한 입장을 항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제3공화국 당시 혁명정부의 주체가 학살의 주체인 군부였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서도 진상을 규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국민보도연맹의 진상 규명에 가장 앞장서서 활동하던 이원식이라는 사람이 이적행위자로 기소되어 사형 선고 받는 사건이 있자 보도연맹에 관한 진실을 규명하려던 노력은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보도연맹의 가족들은 그들의 자식들이 빨갱이의 자손들이란 소리를 들으며 피해를 입을까봐 그냥 쉬쉬하고 살아야만 했다.

이 보도연맹의 광풍은 울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울산은 심불산을 근거지로 한 빨치산이 날뛰던 곳이기 때문에 전선으로 보면 후방이면서도 빨치산의 테러에 노출되어 있는 고장이어서 보도연맹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특히 범서는 이관술의 고향이고 그의 신출귀몰한 행적으로 경찰이 골탕을 먹고 있었으므로 이관술과 어떤 경로이던 간에 인연이 있는 사람으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었던 사람들은 학살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곳 사람들 중 상당수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처형되었다.

울산의 보도연맹 연루자들을 처형한 곳은 울산에서 부산으로 넘어가는 심복고개 어디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보도연맹으로 끌려 온 많은 사람들이 파놓은 구덩이 앞에서 일렬로 세워놓고 무차별 살상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운이 좋은 사람은 그 와중에서도 살아남아 후일에 이 기막힌 학살현장을 증언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범서에 사는 모씨도 보도연맹에 가입한 죄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20대의 나이로 이곳 학살의 현장으로 끌려갔다. 그는 총소리와 함께 그만 기절하였는데 얼마인지도 모를 시간이 지난 뒤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총에 맞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시체들을 비집고 나와서 야밤을 틈타 집으로 돌아왔다.
▲보도연맹으로 집단학살된 사람들의 유해     ©울산여성신문

집으로 돌아 온 그는 홀 어머님과 아내에게 자기가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헛간에 구덩이를 파고 은신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고 있었다고 했다. 이 사람의 어머니는 젊어 홀로된 과부였기 때문에 성질이 좀 까다로웠다고 했다.

그런데 몇 년의 긴 시간을 숨어사는 것에는 성공하였는데 피임이 어려웠던 그 당시인지라 어느 날부터 그의 처의 배가 자꾸만 불러오게 되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과수가 된 여인의 몸이 불러오자 쑤군거리며 흉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성미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그녀의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배가 불러오는데도 며느리를 닦달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상하게 대해주니까 동네에서는 시어머니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며 수군거렸고 이 며느리는 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러 국내 치안질서도 차츰 잡혀 갔고 이젠 내가 살아있노라고 밝혀도 다시 붙잡혀갈 염려가 없다는 확신이 들 무렵, 이들은 집으로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서 푸짐하게 음식을 대접하면서 아들의 이야기를 자초지종 상세히 설명했다. 그제야 의문이 풀린 이웃들은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위로하며 모두들 부러워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이야기는 인근 마을까지 퍼져서 한동안 화젯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 범서에서는 몇 년 전인가는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이관술의 친척들이 그를 항일운동가로 미화시켜 선바위 앞, 주유소가 있는 부지에 그의 항일운동 업적을 담은 공적비를 세운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이 우익진영에 알려지자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빨갱이의 생애를 미화시켜 버젓이 공적비을 세우게 놔둘 수 없다며 물리적으로 철거를 시키려고 하자 이관술의 친척들이 자진하여 비석을 철거시킨 해프닝도 있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 이전에 항일운동의 업적은 왜 인정해 주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가 몸담았던 공산주의로 인하여 무수한 동족의 생명이 희생되었음을 상기한다면 항일운동으로 면죄부를 받기엔 그 과오가 너무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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