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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부임하는 지서장들은 이관술의 친인척 사찰에 혈안이 되고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지낸 골수 공산주의자
기사입력: 2006/06/16 [18:0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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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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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탐방 - 범서읍2
 
이곳 범서에 토박이로 살은 분들에게 이곳 출신으로 골수 공산당원으로 후에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지내다가 숙청된 이관술(李觀述)에 관하여 물어보았더니 이외로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떤 분들은 빨갱이 우두머리가 아니냐며 그 사람 때문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분들은 공산주의라기보다 항일운동가가 아니냐며 그를 두둔하는 분들도 있었다.

이곳이 고향인 이관술에 대하여 이렇게 견해가 양분된 것은 이곳 사람들 이야기로는 아직도 적잖은 이관술의 친인척들이 이곳에 살고 있어서 그들은 이관술의 항일 업적만 내세우며 공산주의 운동은 입에 담지 않는다고 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보면 그들이 이관술을 두둔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제3자들은 그의 행적에 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좋을 듯하다.

더구나 이곳에는 오래전에 이관술의 공적비를 세웠다가 우익 시민단체들의 강력한 항의로 철거한 적도 있는 곳이고 보면 이관술에 관한 시비는 앞으로도 재연될 가능성도 없지 않을 듯하다.

이관술은 1900년 이곳 울산시 범서읍 입암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본의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동덕여자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자치 및 교내에 수시로 출입하던 경찰들의 교내 출입금지를 이유로 학생들이 벌이던 동맹휴업을 뒤에서 조종하면서 항일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 이듬해인 1932년에는 누이동생인 이순금(李順今)과 이순근(李舜根), 김도엽(金度燁) 등과  함께 일부 일본학생들을 포함하여 조일반제공동투쟁동맹(朝日反帝共同鬪爭同盟)을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만주출병을 반대하다가 붙잡혀 4년형을 언도 받았다.
 
그는 복역 중 1934년 4월 병으로 보석되어 출옥하게 된다. 그는 출옥한 후 그 해 8월 다시 각 학교를 중심으로 반제동맹을 결성하려다가 다시 붙잡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가 항일 운동가에서 골수 공산당원으로 변신한 데에는 구구한 억측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 때 일어난 광주학생의거가 도화선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보여준 우유부단한 태도에 실망한 그는 그냥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사회주의 운동에 직접 뛰어들게 된다.

그는 이재유(李載裕)등과 함께 반제동맹재건을 도모하며 적기(赤旗)라는 잡지를 출간하여 반제투쟁을 도모하다가 이재유가 검거되자 강원도와 경상도 등지를 전전하며 피해 다니다가 1937년 다시 상경하여 영등포 등지에서 노동자 조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이관술은 김삼룡, 이순금, 장순명, 권오직, 이현상, 등과 함께 경성콤 그룹을 조직하고 반일운동을 이끌어가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 이관술은 박헌영의 재건파 공산당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45년 9월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설립된 조선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및 선전부장 대리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 후에도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 2월 좌익단체의 총연합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조선정판사 화폐위조사건이 터지게 된다. 조선 정판사는 일제 말에 조선은행 100원 권을 인쇄하던 지카자와 인쇄소의 후신으로 공산당 본부가 들어있던 곳이었다.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공산당은 재정부장 이관술과 당 집행위원 겸 해방일보 사장이던 권오직이 조선 정판사 사장 박낙종과 서무과장 송언필에게 지폐를 위조할 것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1945년 10월 하순부터 1946년 2월 상순까지 6차례에 걸쳐 1200만원 상당의 100원 권 위폐를 인쇄하여 유포시키다가 발각되어 나라가 떠들썩했던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 터진다.
 
이 사건으로 권오직은 월북하게 되고 이관술은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고 나머지 일당들은 10년에서 15년의 형을 선고 받았다.

공산당은 이 사건을 맡은 판사와 검사들을 협박하기도 했고 공판 때는 판ㆍ검사석과 서기석까지 점령하여 공판장을 아수라장을 만들기도 했다.

이 사건은 미 군정청을 자극하여 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조선정판사를 폐쇄시켰는데 공산당 측은 이 사건이 고의적 날조라며 항의하면서 그들의 신전술(新戰術)을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이 후부터 공산당의 테러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이관술은 6ㆍ25사변 전ㆍ후에 북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지낸 것 까지만 알려지고 그 뒤 행적이 묘연했는데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결국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이관술이 북에서 고위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곳 울산 경찰서 범서지서에 부임하는 지서장들은 부임초기에는 어김없이 이관술의 대소 집안의 사찰은 물론이고 친인척들에게 까지 항상 밀착 감시를 했다고 전해진다.
 
6ㆍ25전쟁 중에는 이관술의 친인척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까지 요주의인물로 감시했다고 하니 이관술 일가에 대한 당국의 감시가 얼마나 철두철미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전쟁 중에 보도연맹이란 것이 결성되었는데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고안해 낸 좌익 포섭단체였다.
 
조직결정의 대외적인 명목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고, 조직의 이름도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뜻의 보도연맹이었다. 외형상으로는 민간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실상은 정부기관이었다.
보도연맹은 창설한지 1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자 이들은 빨갱이로 의심 가는 사람들을 재판절차 없이 집단학살하는 만행을 남한 곳곳에서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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