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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배나무단지(團地)가 아파트단지로 바뀌어
백룡담에 우뚝 선 선바위(立岩)의 전설이 출렁이는 강
기사입력: 2006/05/31 [14:39]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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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본지주필, 시인

▲     © 아파트단지로 바뀐 배나무단지

 
굴화역(掘火驛)은 웅촌면 곡천리(曲泉里)의 간곡(肝谷驛), 삼남면 교동리(校洞里)의 덕천역(德川驛)과 함께 경주와 동래를 잇는 교통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
 
범서읍은 사연리, 천상리, 입암리, 굴화리, 서사리, 두산리, 구영리, 중리, 망성리, 척과리의 10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

울산시와 인접해 있는 천상과 구영리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울주군의 어느 곳 보다도 인구가 많다. 옛날에는 다운동 일부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중구로 편입되었다.

남구와 경계를 하고 있는 굴화리는 앞서 언급한 대로 울산의 발상지로 옛 영화를 누렸던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고려 이래로 교통의 요충지로서 굴화역(掘火驛)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굴화역은 웅촌면 곡천리(曲泉里)의 간곡(肝谷驛), 삼남면 교동리(校洞里)의 덕천역(德川驛)과 함께 경주와 동래를 잇는 교통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기도 했다.

1786년 정조 10년의 읍지에 의하면 굴화역은 중마2필, 복마5필과 노(奴)11인, 비(婢)5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대마가 없었던 것은 대로(大路)보다는 소로(小路)가 많았던 지형상의 이유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굴화가 이러한 역이 있었던 관계도 있지만 옹기를 굽던 곳이기도 하여 옛날 사람들은 이곳 굴화 사람들을 경원시 하는 풍조가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나이가 70대 후반의 노인 분들은 이곳 굴화 사람들은 역원이나 도공 같은 천인들이 살던 곳이어서 이곳 사람들과는 혼사를 하지 않았다고 술회하는 것을 보면 반상의 서열이 서릿발 같았던 조선시대의 그릇된 풍조가 현대까지 그 흔적을 지탱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은 구영리와 천상리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옛 자취는 찾아볼 길이 없지만 이곳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농민들이 논밭을 일구며 살았다.
 
일부는 옹기 굽는 일에 생명줄을 걸고 있었는데 이들은 가진 것은 없어도 입고 먹는 것은 웬만한 부농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구운 옹기를 시장에 가지고 가면 바로 현금화 시킬 수가 있었기 때문에 씀씀이가 헤펐고 돈이 없을 경우에는 옹기와 사고 싶은 물건과 물물교환도 가능했기 때문에 입고 먹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천상리는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곳의 대부분이 배나무 과수원이었다.
 
이곳은 배꽃이 필 무렵이면 온 들녘이 흰 배꽃으로 덥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 반면 논은 산비탈을 끼고 있는 계단식 천수답이 많아서 논으로서의 가치가 별로 없었고 밭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러한 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곳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순박하게 농사만 짓던 농부들은 졸지에 돈방석에 앉는 벼락부자들이 속출했다.
 
그 벼락부자들은 돈을 잘 관리하여 알뜰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갑자기 돈벼락을 맞아 정신이 붕 뜬 사람들은 흥청망청 돈을 뿌리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들도 있고 돈을 쓸 줄 몰라 통장만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다가 아들, 딸들이 부모 대신 그 돈을 탕진한 예도 적지 않다고 한다.

아직도 구영리에는 대단위 아파트가 건립중이고 천상에도 대단위 아파트를 건립할 부지가 매입되어 착공 날자만 기다리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웬만한 곳의 1개시에 버금가는 인구가 이곳으로 몰려들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곳 천상과 구영리에서 두동쪽으로 가는 도로를 조금 가면 울산의 12경 중의 하나인 ‘선바위(立岩)’가 나온다. 이 선바위는 태화강 백룡담에 우뚝 서서 그 기기묘묘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이 선바위에는 처녀와 스님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이곳 입암(立岩)마을에는 달덩이처럼 아름다운 미모의 처녀가 살고 있었다. 이 처녀의 미모가 천하일색이라 마을 총각들은 물론 주위 마을의 총각들의 애간장을 태우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나타나 공양미 동냥을 하며 마을을 돌다가 이 처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마땅히 스님의 신분으로 그냥 지나쳤어야 했건만 천하절색이라는 처녀의 미모에 호기심이 발동한 스님은 이 처녀의 집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어느 날 이 미모의 처녀가 빨랫감을 이고 냇가로 나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처녀를 처음 본 순간 스님은 천하절색의 미모에 넋을 잃었고 그날로부터 그 스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승려의 신분으로 여염집 처녀를 어찌할 수 없었던 스님은 단념하려고 하여도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날마다 입암 마을을 맴돌고 있었다.

처녀가 보고 싶으면 처녀 집의 싸립문에 서서 시주를 얻으러 온 것처럼 목탁을 치며 한 번씩 처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애만 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시 처녀가 빨랫감을 이고 태화강으로 가는 것을 보고 스님도 뒤따라가게 되는데 마침 태화강 상류에서 큰 폭우가 내려 홍수가 밀고 내려왔다.
 
엄청난 물굽이가 꿈틀대며 흘러내리는데 불가사의하게도 큰 바위 하나가 우뚝 선 채로 둥둥 떠서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빨래하던 처녀가 하도 신기하여 “어머! 정말 이상해라. 저렇게 큰 바위가 떠내려 오네”하며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우람한 바위가 처녀 쪽을 향해 덤벼들듯 떠내려 왔다. 처녀는 비명을 질렀고 이를 지켜보던 숲 속의 스님은 황급히 뛰어가 처녀를 구하려고 처녀를 부둥켜안았지만 바위는 처녀와 스님 모두를 바위 밑에 깔고 앉아 버렸다. 처녀와 스님은 한 날, 한 시에 선바위(立岩)에 깔려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되고만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는 선바위가 서 있는 백룡담에는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려고 하는 날 밤에는 애달픈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백천(栢川)에는 큰뱀(大蛇)이 금빛 찬란한 서광을 발하여 물살을 가르면서 백룡담으로 올라가 처녀혼(處女魂)과 상봉하며 즐겼다고 하는데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영락없이 큰비가 내려 이 지방에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전설을 품고 있는 선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그 의연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고 해마다 울산을 찾는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 그 기기묘묘한 자태에 탄성을 지른다. 그리고 수영금지란 팻말이 붙어있지만 이를 아랑곳 하지 않고 수영을 하다 이 백룡담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고 하니 그 처녀의 원귀가 아직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는가 싶어 오싹한 느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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