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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울산탐방 - 반탄골
기사입력: 2006/04/26 [09:11]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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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주필/시인

투우대회 때마다 황소몰고 나타나시던 아제
언양털털이로 불리웠던 자갈길을 달리던 버스

 
1960, 70년대의 울산은 도로 전체가 거의 포장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도로는 비가 온 뒤에는 여기 저기 웅덩이가 생겨서 물이 고여 있었고 길을 가다가 그 웅덩이 물에 차가 지나가면 꼼짝없이 흙탕물 세례를 받기가 일쑤였다.

울산에서 언양으로 가려면 지금의 태화동을 거쳐 현재 동강병원이 있는 고개, 소위 반탄골을 지나서 구 삼호교를 건너 굴화리와 범서를 거쳐야만 언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길의 교통이 도로사정 때문에 버스를 타고 가도 엉덩이가 들썩거릴 정도로 험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포장도로에 자갈을 깔아둔 도로라서 자동차가 지나갈 때 마다 돌멩이가 튀었고 덜컥거려서 우리들은 이 언양 가는 버스를 가리켜 ‘언양털털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6차선 도로로 뚫려있는 태화교 부근도 그 당시에는 비포장도로에 자동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의 도로였다. 그리고 지금의 우정시장과 산복도로는 논과 밭이었고 태화교에는 나룻배 한 대가 사람을 실어 나르던 것이 불과 40여년 전의 울산이었다.

우정삼거리에서 현재의 태화교쪽으로 가다가 강변도로로 빠지는 지점의 오른쪽 버스 정류장 부근에는 그 당시 울산 군민에게 식수를 공급하던 정수장이 있었다. 우리들은 태화강에서 멱을 감고 놀다가 이곳을 지나칠 때는 이 정수장의 나무그늘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도 했는데 이 부근에서는 협소한 도로 사정 때문에 교통사고가 자주 생기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들이 직접 목격한 교통사고 중에 하나는 시내 선배 한 분이 용금수에서 멱을 감고 오다가 트럭이 갑자기 덮쳐서 트럭과 함께 길 밑 논에 떨어져 트럭 밑에 깔린 그 선배의 허연 다리만이 모시반바지와 함께 보였는데 우리는 그저 발만 동동 굴리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또 한 건의 교통사고를 목격한 것은 우리들이 정수장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자동차가 급정거하는 소리가 들려 뛰어나가 보니 트럭 밑에 열 살 미만의 여자애가 뒷바퀴에 다리가 깔려있었는데 이 트럭은 웬일인지 딱 멈추지 않고 슬슬 앞으로 가며 이 여자애의 몸뚱이위로 트럭바퀴가 지나가는 것을 우리는 악! 악! 하는 비명과 함께 트럭을 두드리며 지켜보았다.

이 광경을 목도한 후 필자는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그 뿐 아니라 꿈에서도 그 여자애의 주검이 자꾸 보여 소스라치며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들은 한동안 왜 그 트럭이 멈추지 않고 슬금슬금 지나갔을까 하는 의문을 두고 친구들 끼리 왈가왈부하였는데 어른들의 이야기로는 애가 병신이 되어 평생 물어주는 돈 보다도 딸깍 죽어버리는 것이 오히려 합의하기가 쉬워 종종 그런 상식 밖의 일들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목숨마저 돈에 짓이겨지는 참혹한 현실에 몸을 떨기도 했었다. 요즘 생각해보면 보험이 없던 시절의 애환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 정수장을 지나서 현재의 태화교 부근에는 우정동과 태화동을 갈라놓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이 개울이 복개되어 있어 보이지 않지만 제법 큰 개울이었는데 현재 교육청이 있는 뒷산의 무지개골에서 흘러내려오는 이 개울은 우정동과 태화동의 생활 오수까지 몽땅 받아서 태화강으로 배출하고 있었다.

이 개울을 기점으로 동강병원 방향으로 가는 오르막이 있었다. 현재도 약간 오르막이지만 그 당시에는 꽤 높은 오르막이어서 우리들은 자전거를 끌고 이 오르막을 올라가서는 동강병원이 있는 내리막길을 자전거로 신나게 내려가며 놀던, 그러다가 자갈길에 넘어져서 얼굴을 갈아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던 그 시절이 짜릿한 그리움으로 회상된다.

이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현재의 동강병원 부근에 부사(府使) 윤지태(尹志泰)의 불망비각(不忘碑閣)이 있었고 그 옆에 초라한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길옆인 탓으로 먼지가 뽀얗게 묻어있던 이 불망비각은 현재에도 동광병원의 담장에 박혀있는 신세가 되었는데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선정을 베푼 부사의 불망비를 이렇게 일개 병원의 담장 속에 가두어 두어도 되는 것인지 씁쓸한 느낌이다.

이 불망비각을 지나면  다시 오르막 언덕이 나타나는데 현재에도 경사가 있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이 고개를 넘어야 다운동 방향으로 갈 수 있었는데 이 고개 일대를 사람들은 ‘반탄골’이라고 불렀다. 지명이 왜 반탄골인지는 몰라도 그 무렵에는 초가집 몇 채가 여기 저기 모여 있었고 여기에 사는 분들은 대개가 농사가 주업이어서 사람들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이 반탄골에 먼 친척뻘 되는 아제 한분이 계셨는데 신체는 건강하였으나 한쪽 눈이 약간 사시인 장애를 가지신 분이었다.

이 아제 집에는 황소가 한 마리 있었는데 아제는 이 황소를 무척 아끼셨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저 농사나 지으면 알맞겠다 싶은 이 황소를 아제는 추석 후 태화강에서 한 번씩 벌어지던 투우대회에 이 황소를 끌고 와서 출전시켰는데 결과는 보나마나 첫판에 나가떨어지는 참패였다. 그러나 아제는 투우대회가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황소를 몰고 개선장군처럼 나타나시곤 했었다.

결과는 뻔한 것인데 그럴 때 마다 아제는 데포 잔에 막걸리를 마시며 이를 악물고 허공을 바라보며 씩씩대던 모습이 어린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싸움에 진 황소를 몰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석양 속에 반탄골로 향하던 그 아제가 안쓰러워 나도 훌쩍이며 울기도 했었다.
 
황소의 포효가/강물로 강물로 떨어지던 날/꽹과리 소리는 백사장/넓은 공간을 흔들고 있었다/생명처럼 황소를 기르던/반탄골 아제/독한 소주를 냉수처럼 마시며/어깨가 찢어진/황소의 울음을 울고 있다/아제여/ 찢어진 것이 어찌/황소 어깨뿐이랴/우리들 배고픔도 마침내/찢어져서/태화강 굽이굽이에 널리는 것을/ -태화강2 전문-
 
이 시는 필자의 첫 시집에 실린 시로서 그 당시를 상기하며 지은 필자의 졸시(拙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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