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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6.25 전쟁은 우리에게...?
기사입력: 2014/06/25 [12:45]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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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은 기자

한국사 최대의 동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전쟁’

수백만 명이 사망, 국토 80% 파괴되고 상처를 남긴 전쟁...요즘 세대 ‘남침’, ‘북침’도 헷갈려


6월 11일 새롭게 지명된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첫 출근부터 여론의 비난을 거세게 받았다. 지난 2011년 용산의 한 교회 강연에서의 발언이 문제가 된 것. 문 후보자는 강연에서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 민족이 게을러서 시련을 주신 것” 등의 민족 비하 발언을 했다. 한 나라의 총리직으로 거론되고 있는 후보가 심각한 ‘역사인식’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발언은 우리나라의 역사인식 문제를 단편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난해 한 언론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고등학생의 69%가 6.25전쟁은 ‘북침’ 이라고 응답했다. ‘북침’은 북쪽 지방을 침략했다는 뜻으로 ‘6.25전쟁은 북침’이라고 답변하면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다는 뜻이 된다. ‘남침’이 올바른 표현이다. 물론 학생들의 답변이 질문을 오판하고 답을 했다고 밝혀졌지만.

북침은 북한이 침략해왔으며 남침은 남한이 북을 침략했다고 잘 못 판단했다는 것이다. 용어 자체가 오판을 불러올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남침, 북침이 아니라 북한이 남한을 침범했다로 명확히 해야한다.

같은 시기 전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6.25 한국전쟁 초등학생 의식조사’에서는 80%가 6.25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은 북한이라고 답변했으며 94%가 6.25는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난 날이라고 답했다. 초등학생의 경우 역사관련 다양한 재량 수업과 5학년부터 배우는 역사과목이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반면 고등학생의 절반이 넘는 수가 ‘북침’으로 알고 있다는 점은 부족한 역사 교육으로 인해 나이가 들수록 ‘역사 인식’이 흐려짐을 뜻한다.

고등학생들도 초등과정에서 배운 역사인식이 흐려지고 있는데, 성인들은 이보다 심각할 것이다. 수년째 일본의 역사 왜곡문제로 곤혹을 치르고 있지만 역사교육에는 변화가 없다. 역사 속에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억울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 인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다가오는 6.25를 맞이해 6.25전쟁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6.25전쟁이란?

6.25전쟁 또는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공산군이 남침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1953년 7월 26일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휴전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과 반공 양대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냉전시대의 갈등이 폭발한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전쟁 발발, 그 배경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직후, 3.8선을 기준으로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각각 분할 점령했다. 군정이 끝난 후 북한은 공산주의 남한은 자본주의 이념으로 인해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나눠져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한편, 이 시기 북한에서는 ‘북한을 먼저 사회주의화시켜 민주 기지로 삼은 뒤 남한을 사회주의화시킨다.’는 민주 기지론이,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북진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어 남북 간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1949년 3월, 김일성 등 북한의 핵심 인물들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 공산당의 ‘마오 쩌둥’을 만나 남침 동의와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다. 또한 1948년 12월 소련이 북한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하자 전쟁은 본격화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38도선 전 지역에 총 공격을 시작했고 전투가 시작된지 사흘 만에 서울은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전쟁의 상처

7월 17일 빠르게 유엔군과 미군이 개입했지만 낙동강까지 밀렸다. 그리고 9월 15일 새벽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다. 이후 중국의 만 명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한반도는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남북한은 물론 미군과 중공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자, 휴전 회담이 진행됐다.(1951년 3월) 하지만 2년간의 휴전회담동안 산봉우리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계속되었고 한국전쟁 기간 중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된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맺게 된다.

휴전 후 사상자 400만 여명(남한·유엔군 147만, 북한·중공군 292만), 이산가족 1천만 명, 수많은 전쟁고아가 생겨나는 피해를 입었다. 또, 국토의 80%이상이 파괴되며 한반도에 상처만을 남긴 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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