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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최일성 주필의 울산 탐방(探訪) - 옥교동 4
기사입력: 2005/11/29 [21:23]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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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주필

중앙시장 부근엔 울산최초로 카바레가 개업해


신식춤에 맞들인 주부들이 들끓던 월광 카바레



‘고 향은 가시밭길’ 이라는 오영수 선생님의 글은 우리들의 상상보다 준웅 형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술자리에서 이준웅 형은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울부짖듯이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우리가 선생님을 잘못 모신 바도 없는데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우리에게 하실 것이지 신문지상에 내놓고 후배들을 매도할 수가 있어!”  라며 술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울분을 토하는 것을 필자가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표구사 주인이었던 이상국 씨는 “내가 죽일 놈이다.” 라는 말만 하면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고 주위에 있던 몇몇 문우들에게도 많은 핀잔을 들으면서 말 한마디 하지 못하며 눈물만 글썽거렸다.
 
▲구 주리원백화점에서 중앙시장으로 향하는 1960년대 말의 도로
준웅 형은 몇 날 며칠을 술로 울분을 달래다가 그것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그 당시 부산일보 울산지사를 찾아가서 애꿎은 지사장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그 때 지사장은 서상연씨 이었는데 서상연씨는 영문도 모르는 일이어서 본사에 알아보겠다는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일보도 거물급 문인의 투고니 웬 떡이냐 싶어 원고를 그대로 게제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인데 화가 풀리지 않은 준웅 형이 괜히 부산일보 울산지사에 화풀이를 한 것은 후일 그의 이야기대로 가만있으면 병이 날 것 같고 영감(오영수선생)에게 대놓고 대들지는 못하겠고 해서 부산일보에라도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고 술회하면서 껄껄 웃었던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부산일보의 지사장을 하던 서상연씨가 나중에 울산문인협회의 회장을 맡아 활동한 것을 보면 세상이치가 묘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서상연 시인은 문학이 좋아서 이름 있는 문인들을 찾아다니며  문학적 소양을 키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서상연 시인이 울산문인협회를 맡아 활동할 무렵 소설가 김동리 선생님과 시인 성기조 선생님 시인 박화목 선생님 등 많은 문인들을 울산에 초청하여 융숭한 대접을 한 것도 그 당시의 인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실속 없이 살아가던 준웅 형에게 큰 시련이 온 것은  전두환 정권 때 자행된 “삼청교육”이란 인간개조 프로그램에 휘말리고 부터였다.
 
지금도 그 삼청교육대란 것이 두고두고 비난을 받는 것이 사회의 암적 존재라면서 인간개조를 해야 한다며 잡아들인 소위 깡패나 사회적 비난을 받던 인사들 외에도 그 정권에 미운 눈이 박힌 사람이나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난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을 잡아들여 삼청교육대란 무시무시한 곳으로 몰고 가서 거의 반죽음을 시킨 일들이다.
 
그 무렵 울산에서 삼청교육대로 보낼 사람들을 찾아 혈안이 되어 있을 때(일설에는 할당량이 내려왔다는 설도 있었다.) 준웅 형의 부인이 잡혀가게 되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 생긴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도 그분은 남편 말이라면 대꾸 한마디 않는 분이였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기 위하여 집에서 콩나물을 길러 팔 만큼 근면하면서 시어머님을 하늘 같이 공양하던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남자들도 벌벌 떤다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기가 막힌 준웅 형이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죄목이 고리대금 즉 사채놀이를 하며 여러 사람들을 울린 악질 범이어서 잡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이 말이 거짓임이 이내 들어났는데 그 경위는 이랬다.
 
▲     © 중앙시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현대식 아케이트 상가
그 당시 유행하던 계모임을 알고 지내던 몇몇이서 하면서 계주를 했는데 그 계원 중에 경찰 간부의 부인이 있었단다.
 
그 경찰간부의 부인은 곗돈을 타먹고 난 뒤 매월 내어야 할 곗돈을 주지 않아서 독촉을 하면서 조금 다투었는데 그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악질 고리대금을 하는 사람이라며  허위로 일러바쳐서 아닌 밤중에 홍두께 격으로 준웅형의 부인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는데 그런 사실이 아니라고 탄원을 하고 해도 그 당시에는 통하지 않았다.
 
그런 일로 말미암아 준웅형은 문학을 접고 사회운동가로 변신하여 정부와 싸우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대학을 다니던 성장한 딸들도 자기 어머니로 인하여 목도하게 된 이 사회의, 권력의 횡포에 맞서서 운동권학생으로 변신하여 독재 권력과 투쟁하는 투사로 변신하게 되었다. 
 
한 가정의 행복이 한 경찰간부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하여 풍비박산이 되었던 것이다. 그 뒤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시위 현장에 종종 얼굴을 보여 준웅형을 알고 있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울산 최초의 카바레가 문을 열었다. 그 위치는 구 주리원 백화점에서 중앙시장으로 가는 길의 우측에는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 위에는 블록을 찍어 만들던 블록공장이 있었는데 그 공장 곁에 월광카바레란 이름으로 무도장이 문을 열었다. 개업 초기의  월광카바레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 월광카바레의 악단장은 울산MBC 초대 악단장을 역임했고 울산 연예협회의 초대 지부장을 역임한 연예계의 원로이신 이일우 선생이었다.
 
이 무렵 이곳을 자주 찾은 사람들은 MBC 연예프로를 담당하고 있던 장승제씨, 편성국장으로 재직하셨던 고 박00씨, 아나운서로 계셨던 김00씨와 이준웅씨 등이었다.
 
특히 필자의 기억으로는 이일우선생과 이준웅씨는 단짝으로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같이 다녔던 장승제 시인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그 당시는 하루라도 같이 만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을 정도로 술을 마셨는데 거의가 폭음이었다는데 몇 달도 아니고 몇 년을 그렇게 마셔댄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술회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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