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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최일성 주필의 울산 탐방(探訪) - 옥교동 3
기사입력: 2005/11/12 [09:33]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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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주필

오영수 선생의 ‘고향은 가시밭길’ 내용은 사실과 달라


시인이 대포집 주인대접도 못받는다며 울분을 토하던 박태문 시인

 
그 당시 울산문인협회는 월회비도 형식적으로 얼마를 정해놓고 있었지만 회비를 내는 회원은 몇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문협 지부장은 거의 사비로 월례회 등 회원들의 모임 경비를 충당해야만 하는 그런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러다가 김인섭 지회장이 타지로 발령이 나서 울산을 떠나자 그 뒤를 이준웅 형이 문인협회를 맡아 운영했는데 금전적으로 넉넉지 못했던 이준웅 형은  75년 3월부터 80년 1월까지 8,9대 지부장을 맡으면서 물심양면으로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당시 출판된 울산문학도 이준웅 형의 사비로 출간되었는데 그 뒤에는 누님의 장원인쇄소가 물주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관계로 두 남매간의 사이는 금전으로 인한 마찰이 자주 있었다고 들었다. 
 
이무렵 울산, 부산에 거주하던 문인들이 뭉쳐 만든 시동인지 “잉여촌”이 결성되어 첫 작품집을 내기도 할 무렵이었다.
 
이 당시 울산 문인협회는 월례회 및 회의를 주로 옥교동 현재 중앙호텔이 있는 도로 건너편의 미도다방에서 가졌다. 
 
문인협회 회의가 있을 때는 미도 다방의 맨 끝 자리는 우리회원들이 진을 치고 종업원이 갖다 주는 엽차만 홀짝홀짝 마시며 늦게 오는 회원들을 기다리곤 했는데 그 자리는 열댓 명이 회의하기는 안성맞춤인 그런 명당이여서 평상시에도 회원들은 이 자리를 즐겨 이용했다.
 
이곳에서 회의가 끝나면 간혹 저녁을 먹을 때에는 성남동 구 산림조합 입구에 있던 함흥 집에서 식사 겸 술자리를 가졌다.
 
이집은 묵채가 맛있어서 사람들이 즐겨 찾던 곳인데 지금은 신정동 어디에 이전해서 영업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다방에서 월례회를 하고 식사가 아닌 술을 시작할 때에는  현재 중앙호텔 뒤편 주점골목에서  술을 먹든지 아니면 중앙시장 안에 ㄱ자형으로 늘어서 있던 대폿집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는데 소변을 하려고 밖에 나오면 우리회원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밖에까지 훤하게 들릴 정도로 시끄러웠는데 그 중에서도 다혈질이고 옥타브가 높은 준웅 형의 목소리는 밖에 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들렸었다.
 
거기서 술자리가 끝나면 후배들에게는 항상 다정다감하던 준웅 형은 우리 또래의 후배들을  준웅 형이 살던 집 부근, 즉 굴다리 주위의 술집으로 데리고 가서 새벽 한,두시가 되도록 술을 마시며 지금 생각해보면 쥐뿔도 영양가가 없는 문학과 그 당시 암울하던 사회를 개탄하며 의분강개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술을 마실 때는 준웅 형은 거의 만취가 되어 몸을 못 가눌 정도가 되어 우리들이 부축해서 집까지 모셔 드리고 했었는데 우리들이 취한 준웅 형을 부축해서 갈 때 마다 준웅 형의 어머님이 주무시지 않고 아들을 기다리며 거실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계시던 모습이 지금도 훤하게 떠오른다.
 
그 때 주로 같이 마시던 문우로는 현대 계열의 회사에 다니던 금병소 와 조흥은행에 대리로 근무하던 윤광수 등이었는데 준웅 형이 취해 떨어지면 술값은 형편이 괜찮았던 윤광수가 주로 지불하곤 했었는데 어쩌다가 내가 술값을 내려고 하면 놈팽이 주제에 무슨 돈이 있다고 하며 억지로 술값계산을 하던 윤광수의 서글서글하던 웃음소리가 지금도 생각난다.
 
그리고 준웅 형의 친구 겸 문우로서 이곳 새치이의 준웅형 집을 즐겨 찾아 가던 사람들로는  장승재 시인과 시인협회장으로 있는 김헌경시인 그리고 예총회장을 맡고 계시는  박종해 시인 등이 있었고 부산의 문우로는 작고한 시인 박태문 시인이 있었는데 박태문 시인은 그 당시 울산의 모 업체에 근무할 때여서 부산, 울산 간을 출퇴근하고 있었는데 밤늦게 같이 술 마시다가 버스시간을 놓치면 준웅 형 집에서 자고 출근하는 생활을 종종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사이가 가까웠다.
 
그리고 순수한 열정 하나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는 준웅 형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던 사람 중에 한 분이었다.
 
부산의 문학 천재로 불리던 박태문 시인은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준웅 형을 모델로 하여 지은 시 “육교”가 있었는데 내용은 대포집 주인 대접도 받지 못하는 시인의 처지와 그 시인과 밤새 술 마시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육교를 올라가면서 후들거리는 다리는 육교난간이 받쳐주지만 대접받지 못하는 박복한 시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내용의 시였었는데  이 시는 그 당시 준웅 형과 가깝게 지내던 많은 문우들의 심금을 울렸고 암울하던 시대에 문인이 처한 우울하던 생활을 여실히 보여 주는 작품이기도 하였다.
 
필자도 박태문 시인과 준웅 형 이렇게 셋이서 자주 술을 마셨는데 박태문 씨는 얼근히 주기가 오르면 버릇처럼 사회의 부조리를 입에 담는 준웅 형의 이야기를 가로막으며 “봐라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빨자 빨어” 하면서 소주잔을 들곤 했었는데 쉰 듯한 특유의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던 분이었다.
 
지금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김헌경 시인도 그 당시에는 소주 몇 병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비우는 술꾼이었는데 역시 대주가인 박종해 시인과 함께 준웅 형 집에서 술에 취해 신세를 지던 일이 빈번하던 분들이셨다.
 
준웅 형을  생각하니까 또 한 사람이 떠오른다.
 
그 사람은 천도극장 들어가는 우측 코너 건물을 지나면 있었던 골목을 끼고 있는 단층 건물에서 표구상을 경영하던 이상국 씨이다.
 
이분과의 인연은 당시 시인들이 자기작품을 발표하는 수단으로 시화전을 자주 가졌는데 그 작품의 표구를 맡기다가 알게 되어 친하게 지나던 사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그 무렵 한국 단편문학의 거두이신 오영수 선생님이 “특질고”란 필화사건으로 어수선하던 때에 향리인 울산에 내려오셔서 웅촌에 은거하고 계실 때이다.
 
아시는 분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오영수 선생님은 취미로 서예를 하셨는데 그 솜씨가 수준급이어서 선생의 서예작품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을 무렵이었다.
 
오영수 선생님은 마침 자기의 은거 생활지를 둘러보러 찾아온 준웅 형에게 자신의 서예작품을 표구해 달라고 부탁하여 준웅 형은 심부름으로 이상국 씨에게 표구해 달라고 맡겼는데  상국씨가 그만 그 작품을 잃어버린 사건이 생겼던 것이다. 
 
준웅 형은 발을 동동 구르며 상국 씨에게 전국을 헤매더라도 찾아오라며 독촉을 하고 있는 중에 부산일보 지면에 오영수 선생님의 글이 실렸는데 그 사건이야기를 다룬 글이었다.
 
글 제목이 “고향은 가시발길”이었는데 제목이 그렇듯이 고향 후배들이 고의로 그런 사건을 만든 것처럼 글을 썼는데 그 글을 읽은 준웅 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     © 2005 년 현재 새치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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