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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최일성 주필의 울산 탐방(探訪)
기사입력: 2005/10/13 [22:35]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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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주필
옛날 울산에는 옥골새미, 노하새미, 강정새미 이렇게 삼대 우물이 있어서 주민들에게 풍부한 물을 공급해 주고 있었다.
 
노하새미는 학산동에 강정새미는 우정동에 있었고 옥골새미는 현재 옥교동사무소가 있는 사거리의  서북쪽에 있었는데 옥교동의 동명은 이 옥골새미가 있던 옥골을 옥교로 고쳐 부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옥교동은 삼산벌이 개발되기 전에는 성남동과 함께 울산의 대표적인 동네로 울산 토박이들의 희로애락의 추억을 엮어내던 곳이다. 
▲     © 1960년대의 중앙시장 뒤편의 상점들
 
특히 1922년부터 자생적 재래시장으로 출발해서 지금은 지하 주차장과 에스컬레이트및 엘리베이트 시설까지 갖춘 현대식 건물로 새로 단장하여 있는 중앙시장이 이곳에 있고 그 시장을 중심으로 울산의 상권이 형성되던 곳이 바로 옥교동인 만큼 이곳은 울산에 삶의 터전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겐 자기 집 앞마당처럼 익숙하게 다니던 동네이기도 했다.


◈최초의 울산시청과 교육청이 있던 곳 
 
그런가 하면 울산이 시로 처음 승격되고 나서 현재의 옥교동 사무소에 시청이 있었고 그 앞에는 교육청이 있었으니 울산의 심장부로서의 자긍심을 족히 가졌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렇듯 울산의 한 시대를 풍미하던 옥교동은 울산초등학교에서 시계탑 사거리를 거쳐 지금은 사람만 통행할 수 있는 추억의 다리로 변한 울산다리까지의 도로 중앙을 성남동과 양분하여 발전하면서 울산 번영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었다.
 
울산의 상권이 밀집해 있던 동네답게 재래식 건물이던 울산극장에 이어 시민관이란 이름으로 신식 건물의 극장이 최초로 생긴 곳도 바로 이 옥교동(학산)이다.
 
  이 시민관은 성남동에 천도극장과 태화극장이 들어서기 전 까지는 울산제일의 극장으로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청소년이 관람해도 괜찮은 영화가 들어오면 학생들의 단체관람이 줄을 이었고 그 당시 인기를 끌던 “쇼”가 들어오면 그야말로 극장이 터질듯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 쇼에 흥미는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몰래 입장하다가 그러한 학생들을 잡으러 나온 훈육선생님과 숨바꼭질을 하는 풍경도 쉽사리 눈에 뛰던 그러 시절이었다.
▲     ©현재의 중앙시장 뒤편 상가들

 
◈ 유흥문화를 선도하던 화려했던 옥교동

그뿐만이 아니라 밴드가 등장하는 술집인 “바(bar)”가 울산에 최초로 생긴 곳도 이곳 옥교동인데 필자의 기억으로는 그 무렵 조양백화점이라고 울산 최초의 백화점이 있던 그 위쪽 이층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상호는 황금마차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황금마차의 인기는 대단했었지만 술값도 만만찮아서 이용하는 사람들은 돈에 구애를 받지 않는 지방의 유지들이거나 학교 선생님들이 단골로 많이 다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 교사들은 단체로 다니면서 외상술을 마시고 월급날에 서로 추렴을 해서 술값을 갚았기 때문에 서로가 큰 부담 없이 이용하였다.
 
황금마차를 떠올리니까 기억나는 것이 역시 이곳 옥교동 중앙시장 들어가는 입구(구 현대백화점 성남점 건너편)에 울산최초의 카바레가 황금마차 보다도 2여년 앞에 문을 열어 순박하기만 하던 울산의 주부님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도 했었다.
 
소위 신식 사교춤이 울산에 상륙하여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던 시절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역시 울산최초의 레스토랑인 미도가 문을 열어 서양식 품격을 갖춘 음식문화가 싹튼 곳도 역시 이곳 옥교동이다.
 
이렇게 이곳 옥교동은 울산에 신진 유흥문화를 만드는 메카였기 때문에 울산의 젊은이는 물론이고 좀 깨어있는  중장년층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밤만 되면 이곳 옥교동을 기웃거리기 일쑤였다. 


◈ 격변기에 각종 규탄대회로 몸살을 앓던 거리

당시 196,70년 대에는 궐기대회가 유난히 많았다.
 
새마을실천궐기대회나 퇴페풍조 추방 결의대회, 북괴만행규탄대회 등 갖가지 대회가 시가지 중심가에 위치한 울산초등학교에서 거행되었다. 
 
마치고 나면 어김없이 시가지 행진에 나섰는데 많은 시민과 동원된 중, 고등학생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시가행진을 했는데 그 행진 장소가 옛날 일제 강점기부터 장터걸로 불리던 울산초등학교 앞길을 출발하여  옥교동과 성남동 일원이었다.
 
행진을 하면서도 앞장 선 리더가 북괴만행을 규탄한다! 라고 선창하면 시위대는 후창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리면서 규탄한다. 라고 외치던 때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리고 이곳 옥교동은 성남동과 함께 해마다 물난리를 겪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새치이 동네는 장마철이면 제일 먼저 수마에 갇혀 허우적대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 당시 새치이는 지금처럼 집도, 인구도 많지 않았지만 그 당시 동해남부선 철로가 이곳 새치이를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었는데 철둑 밑으로는 거의 호수를 이루듯이 물이 차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무렵 새치이 마을 대부분은 밭이었다. 채소밭 이랑 사이로 옥수수를 심었는데 어떤 해에는 사람 키보다 큰 그 옥수숫대가 물에 잠기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물이 차올랐다.


◈ 새치이와 장대주민들은 장마철만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여기에 살던 주민들과 새치이 서쪽에 있는 장대 주민들은 여름 우기철이 되면 미리 홍수에 대비해서 귀중품이나 아끼는 물건들은 여차하면 옮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하는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생활을 연중행사처럼 하고 살았다.
 
이 옥교동은 옛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곳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사라진 곳에는 넓은 도로가 생겨 있어서 그 당시를 복원해 보는 것이 쉬운 작업이 아닐지 몰라도  구역별로 잘라서 그 당시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그 무렵을 회상하는 것이 훨씬 실감이 날 것 같다.
 
특히 여기는 현재 생존하는 많은 분들의 추억이 함께 하는 곳이므로 그분들의 양해를 구해서 허락하는 분들은 본명으로 허락지 않은 분들의 이야기는 가명으로 처리하여 숨은 야사를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써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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