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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모근
한국 문단의 거목 소설가 故 박완서 선생 영전에
기사입력: 2011/01/24 [15:14]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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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모근 시인/편집위원
 
▲   문모근 시인/편집위원
한국문학의 정점에서 사회를 내려다보던 소설가 박완서 씨(80세)가 타계했다.

영원한 현역이고 싶다던 소설가 박완서씨는 1970년 불혹의 나이로 늦깎이 등단한 후 한국의 어떤 작가보다 열정적으로 소설을 써냈다.

지난 40년간 수많은 책을 냈고,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예민하면서도 신랄한 시선, 현미경 같은 촘촘한 묘사로 실감나게 복원해내는 시대와 개인의 비극에 독자들은 울고 웃었다. 문단의 거목으로 불리는 이유다.

문학에 대한 애정이 강렬해서였을까. 지난해 9월 발병해 10월 초순에 수술을 받은 후 경과가 좋아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 자택과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투병 중에도 문예지 문학동네의 젊은 작가상 심사를 맡아 병상에서 후보작들을 읽었다고 전해졌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 공교롭게도 심사일이었다. 심사장소에 나갈 수 없었던 그는 미리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문학상 심사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 그도 끝내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진 못했다. 22일 새벽 갑작스런 호흡 곤란에 이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졌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온갖 수모와 만행을 견디어내야 했다. 그때마다 그 상황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이 된 것은 언젠가는 이걸 글로 쓰리라는 증언의 욕구 때문이었다. 도저히 인간 같지도 않은 자 앞에서 벌레처럼 기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냐, 언젠가는 내가 벌레가 아니라, 네가 벌레라는 걸 밝혀줄 테다.” 생전에 그의 글에서 밝혔던 소설을 쓰게 된 이유다.

전쟁체험은 그를 문학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었다. 오빠를 잃은 상실감, 아들을 먼저 보낸 참척(慘慽)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고스란히 지켜본 경험이 그의 자양분이자 수원지인 것이다.

전형적인 ‘억척어멈’이었던 어머니를 소재로 한 ‘엄마의 말뚝’ 연작, 화가 박수근이 등장하는 등단작 ‘나목’ 등이 대표적이다. 연작 형식의 자전 장편『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도 한국전쟁의 비중은 상당하다.

그는 88년 교통사고로 막내 외아들을 잃었다. 서울대 의대를 다니던 잘생긴 아들이었다. 이런 기구한 경험은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일기 형식의 소설집『한 말씀만 하소서』등으로 나타난다.

그가 80년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섰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또 1985년 출판사 창작과비평이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자 되살려 내라며 지식인 2853명이 서명한 문서를 박완서 선생이 소설가 황순원·이호철씨 등과 함께 당시 문화공보부에 갖다 낸 사실은 그의 강직성을 알 수 있다.

고인은 황순원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만해문학상, 인촌상, 호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고 2004년 예술원 회원이 됐다. 2006년 문화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고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임종을 접하면서 가뜩이나 어둡고 칙칙한 사회가 그나마 소중하게 갈무리하던 마음의 위안처를 잃은 것 같아 허전하기 이를 데 없다.

정부에서는 고 박완서 선생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훈장 하나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국민의 가슴과 문단에 남긴 발자취를 기리는 한 방법이 아닐까 하여 훈장이 영원히 빛나길 바란다.

그리고 또 다른 글을 쓰기 위해 잠깐 다른 세계로 옮겨간 것만 같은 고 박완서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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