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의도 건영화학대표/국제 pen문학회원

드문 일이긴 하지만 울산의 하늘에 눈이 내린다. 내린다기 보다는 그저 간간이 바람에 실려 흩뿌리고 있다. 

때마침 전화가 온다.
 
귀에 익은 친구의 목소리다.
“창 밖에 눈이 온다.....”

그는 대기업의 임원으로 물러나 심심풀이로 다니는 서예실이라 했다.

눈이 오니까 생각나는 사람, 그게 바로 나 였다니 고맙고 흥감하다. 아이들처럼 들뜬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평소 성격 답지 않게 몹시 정돈 된 사람이라 감흥이 새롭다. 

무슨 작은 일이 생겨도 즉시 전화하는 인정 많은 친구가 있다. 그리고 꼭 내가 전화를 걸어야 응답하는 친구도 있다.

한없이 상냥하고 매너 있는 또 다른 친구가 있는데 곤란한 일이 일어날 때 발을 빼버리기도 해서 아쉬움을 남기는 친구도 있다. 

가슴 속에 있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소나기처럼 왔다갔다 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일년에 두세번 밖에 못 만나도 항상 그리운 친구도 있다.

친구는 낮 밤 가리지 않고 아무 때나 만날 수 있어야 하고, 언제라도  부르면 서로가 달려가야 할 의무가 있다.

기쁜일이나 자랑거리가 생겼을 때 마음껏 자랑할 수 있어야 하고, 들어주어야 하고 눈물날 일 있을 때 위로해 주어야 한다.

친구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아야 하고, 진실로 함께 기뻐해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이다.
친구 사이에 준 것은 잊어야 하고 받은 것은 결코 잊지 않아야 그게 좋은 친구 사이가 된다. 
부유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강해지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좋은 일은 많은 친구로부터 사랑받는 일이다.

사람들은 통장 속의 현금이 제일 소중한 것으로 알겠지만, 좋은 친구도 그에 못지않다. 좋은 친구는 보물과 같다.

가끔은 친구와 자신의 회사에 와서 직원들에게 강연해 달라거나 무슨 이벤트가 있을 때 축사를 부탁해 올 때 상당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가까운 친구로서 온갖 단점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아랑곳 하지 않는 친구의 이해와 우정이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친구의 숫자가 많을 수는 없지만, 서로의 삶을 흔들 수 있을 만큼 친구들과의 우정은 몹시 진지하고 은근한 열정이 거기에 있다.

지난 봄 어릴적 친구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갔다. 초등학교 빼고는 대학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우리는 함께가는 지기(知己)였다.

두 소년들은 여름날의 뜨거운 양철지붕 아래서 함께 있었고, 면도날 같이 추운 겨울 밤에도 그 친구집의 아주 작은 방에서 한 이불아래 발을 묻고 함께 잤다. 장가를 가고 어른이 되었을때도 출장길에 오른 총각인 그가 울산의 신혼 단칸 방에 찾아와서 함께 잤다.

서울과 대구와 울산으로 멀리 떨어져 살아도 전화기 넘어 30분이 넘는 통화는 아줌마들 보다도 더 할 때가 많았다.  공항 터미널 호텔에서 낮 두시에 만나면 창 밖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이야기는 끝이 없다.

언제나 예의 바르면서도 밝게 웃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니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커다란 저금 통장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린 심정이다.

지금도 일산의 그의 집으로 안부 전화를 걸면 미망인은 꺼이꺼이 울기만 한다. 나도 목이 젖어들고 곁에서 듣고 있던 사람도 함께 운다.

가끔 친구는 ‘멸치’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멸치는 머리 지느러미 뼈를 발겨 낸다면 먹을게 없다. 친구에게서도 온갖 단점을 찾아내기 시작한다면, 친구될 사람은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사랑해야 될 일이다. 마치 멸치를 통째로 그냥 씹어 먹게 되듯이 말이다.

이제 새해가 왔다.

지난해 친구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가슴 아프게 한 적 있었다면 서로 용서하고 새해에는 더 잘 하자고 약속하자. 

우린 외로운 인생이니까.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