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김의도
용기라는 것
기사입력: 2010/12/21 [13:14]   울산여성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김의도 건영화학대표/국제 pen문학회원
 
▲  김의도 건영화학대표/국제 pen문학회원
뉴욕 필 하모닉이 몇 년전 평양을 다녀갔다. 공연 중에 박수소리는 요란했으나 아리랑 외에 그들은 무표정 했다.

놀라운 일 한 가지는 공연도중 3층 객석에서 혼자 기립 박수를 치던 한 북한 청년이 있었다. 주위에 아랑곳 하지 않고 혼자 일어서서 박수를 보내던 그 청년.  진짜 사람 냄새나는 반응이 아니었을까.

모두 조용히 앉아 있는데 혼자서 일어난다는 것.

집단은 청년을 향하여 ‘또라이’라고 할런지 모르지만 아무튼 용감한 청년임에는 틀림없다. 그 세상은 여느 나라와는 다른 세상이라서 그럴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쉽게 알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도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는 엄청난 권리 이전에 먼저 의무가 따르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군대도 가야 하고 세금도 내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육도 받아야 하는 것이 의무 인것을 배워서 다 알고는 있다. 그러나 권리를 주장하기 이전에 의무가 먼저인것을 깨닫는데는 저마다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이락 전투에 참전했던 미국의 한 장군이 백아관에 4성장군 진급 신고하러 가는 자리에 이락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은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가서, 남아 있는 한쪽 팔로 거수 경례를 했다는 이야기나, 또 다른 합창의장이 전역하면서 계급장을 떼어내 월남전에 전사한 부하들의 명패 앞에 바쳤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얼마전 미국에서 전해졌다.

그들에게 ‘자유’란 어떤 의미인가?  라고 물었다면 과연 뭐라 답했을까 궁금하다. 
“정의를 위하여 목숨도 아깝지 않게 바치는 것”이란 대답이 들려올 것만 같다.

한국 카톨릭교의 추기경이 어른으로써 4대강 문제와 북한을 향하여 뭐라고 한 말씀했다. 신자의 양심에 평화를 주어야 한다는 추기경의 의무감 때문이었다.
때 맞춰 진보계열 사제단 이십여명이 추기경은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독한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픈 일이었지만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던 찰나에 충청도에 근거를 둔 야당 총재 한 분이 진보계열 사제단을 향하여 칼날 같은 충고(?)를 날렸다.

“안방에서 활개치듯 안전한 서울 광장에서 촛불 시위에서나 앞장서지 말고 삭풍과 탄압이 휘몰아치는 광야로 나가라. 진정으로 용기 있다면 그곳에 가서 정의를 구현하고 순교하라.” 라고.

이 얼마나 매섭고 따끔한 충고이더냐.

신앙의 가르침은 자비와 용서가 바탕이 되어야 할진데, 내려오라 마라, 출입하지 말라 해라 등등의 강경 일색 성명은 신앙의 근본에 위배되는 일이라 생각되어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우리 사회에 어른의 존재가 언제부터인가 미약해졌다. 다칠까봐 눈치를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진정한 어른이라면 그래도 용기를 내어야 할 것이다.

국적도 없는 자유가 활개를 치는 마당에 생각 깊고 무서운 어른이 사라져 버린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이다. 다행히도 연평도 사건 이후 해병대 지원자가 늘었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옳다고 여기는 일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옳다는 여김’이 정말로 옳으냐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자기중심적 자유’보다 더 중요함을 알아야 하겠다. 

“의(儀)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자 복이 있나니”라는 가르침이 더욱 절실한 계절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동
메인사진
[임영석 시인의 금주의 '詩'] 눅눅한 습성 / 최명선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인기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