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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도
어머니의 통곡소리
기사입력: 2010/06/26 [12:05]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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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도 건영화학 대표/국제pen문학회원
▲   김의도 건영화학 대표/국제pen문학회원
그날은 일요일 오후 였던 것 같다. 

교회마당에서 뛰어놀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으나 별 느낌이 없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6.25는 그렇게 어줍잖게 시작되는 듯 했다. 

우리집은 대구의 외곽지대인 반야월동에 살았는데, 6.25가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국군은 경북 왜관의 낙동강변까지 쫓겨 내려왔다.

북쪽 하늘에서 펑 펑 간헐적으로 터지는 대포소리와 함께 벌겋게 물든 여름날의 밤하늘은 날마다 무서움이 더해갔다.

나는 예순이 다 되신 아버지의 얼굴을 살피면서, 어렸지만 미래로 닥쳐올 전쟁의 무서운 그림자를 느끼기 시작했다. 

집에는 부모님과 19세의 형 16세의 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식구가 낮밤으로 공포의 시간을 보내던 어떤날,  마루 끝에 앉아있던 나는 방안에서 아버지와 형이 나누는 얘기를 엿들었다.

“아버지, 나라가 이지경인데 저는 피난 갈수가 없습니다. 싸우러 가도록 허락해 주세요....”
“너는 아직 어린데 네뜻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려므나....”

대충 그런 내용 이었다.  내가 자식을 낳은 한참후에야 아버지와 형의 뜻이 대단했다고 깨달았지만. 

그러나 당장 걱정 거리가 생겼다. 부엌에는 미숫가루와 비상식량을 식구들 나이에 맞게 자루에 끈을 달아 멜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는데, 형이 입대를 하겠다니 어린 나의 생각에도 하늘이 캄캄했다.

그렇게 형은 교회 학생 스무명을 설득시켜 학도병으로 떠나갔다.

다행히도 우리는 피난은 떠나지 않았으나 반야월역에서 까까머리위에 흰 광목천을 두른 형들을 태운 트럭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간 다음, 그 이후 오랜동안 소식이 끊어졌다. 전선에서는 아군에게 불리한 전황만 날마다 전해왔다.

다시 겨울이 왔고 그 겨울엔 유난히 눈이 많이도 쏟아진 듯 했다.
방문을 열어 놓고 어둔 겨울 밤하늘을 향하여 날마다 어머니는 통곡했다.

형의 이름을 부르며
“얘야!  네가 어느 산천에 묻혀있나? 소식이라도 듣게 해다오....’’

나는 어머니의 통곡을 듣고 있었던 것이, 내 생애 가운데 가장 슬프고 뼛속까지 후비는 아픈 추억으로 남아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밤마다 들어야 했던 어머니의 울음소리도 기진하여 힘을 잃어가던 4월 어느 날 해질 무렵, 꿈에 그리던 형이 돌아왔다. 목발을 짚고 절둑거리며 다 떨어진 군복에 그 몰골은 처참했다.

그 이후 어머니의 통곡소리는 그쳤으나, 우리 마당에는 형 친구의 어머니가 자주 찾아와 뎃돌 아래 풀석 주저앉아
“우리 아무개는 어디 갔나? 왜 너 혼자만 돌아왔나?....”

3대 독자를 잃은 형 친구의 어머니는 땅을 치며 슬피 우셨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학도병들은 전멸 하다시피 했으나 스무명이 가서 두명이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나의 형이다.

3대 독자 이웃형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고. 훗날 나의 형은 미국 주립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경북대학에서 교수로 정년 퇴직한 후 지금은 벤쿠버에서 다복하게 살아 계신다. 6.25를 말할때는 언제나 괴로운 표정을 짓기도 하시지만...

지금도 전쟁은 너무 무섭게 기억된다. 나의 어머니 그리고 형친구의 어머니들 모두 세상을 떠났으나, 꺼이꺼이 우시던 그분들의 슬픈 울음소리는 이명이 되어 내가 눈을 감는날까지 쉬이 잊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며칠후면 기억하기조차 끔직했던 그 6.25가 돌아온다. 슬프게도 이제 6.25는 나이든 보수층이나 기억하고 있을 구닥다리 추억으로 전락하고 말았던가!

태,종,태,세,문,단,세 는 줄줄이 외우면서도 1950년의 그날의 슬픈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젊은이가  이땅에 상당수 함께 살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과거는 아플수도 있고 부끄러울 수도 있다. 비록 자랑스럽지는 못할지라도 과거 없는 현재는 존재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그 크나큰 상처들이 아물어  오늘 우리의 대한민국이 건재 하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것 잘못교육시킨 것 등등 많은 것들이 경제 부흥이란 명제 앞에 빛을 잃고 달려온 선배들에게도 큰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 6.25를 앞두고 비록 국군 묘지에 가서 참배 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 큰절 한번 올리면서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그분 학도병들과 이땅에서 전사한 모든 평화의 사자들 그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나에게 있어 6.25는 언제나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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