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컬럼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사입력: 2009/11/03 [16:56]   울산여성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추창호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
▲     © 울산여성신문
올해는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 되는 해로 그 기념식이 10월 26일 서울과 중국 하얼빈 현지에서 동시에 개최됐다.
 
또한 국가보훈처를 비롯해 관련 기관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 찍기 등 다양한 행사를 기획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참 즐거운 소식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100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있는데도 안중근의사에 대한 이런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우는 물론 자라나는 세대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하고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중근의사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하고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여러 고초를 겪다가 결국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분이다.    
 
이 의거는 그 당시 암울한 일제치하에서 조국 광복의 기치를 전 세계에 과시한 대한 남아의 쾌거였으며, 전 세계를 강타한 대 사건이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의 국가 주석이었던 원세개가 ‘평생 경영하신 일 이제 끝났소./ 죽어야 할 땅에서 삶을 구하면 대장부라 할 수 없는 일이죠/ 비록 한국 땅에서 태어났으나 이름을 온 누리에 떨쳤나이다./ 백세 사는 이 없는 세상에 그대는 천년 두고 사시리이다’라는 시를 써서 찬양한 일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안중근의사의 전기를 읽다보면 감동과 존경심에 더욱 옷깃을 여미는 것은 체포 후 의연하게 대처하는 안중근의사의 모습에서다.
 
즉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동기를 당당하게 밝히고,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는 동안에도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 받을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하고,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일본검찰에게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히고 그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한다.
 
신체적인 고초도 정신적인 고통도 엄청났을 텐데도 이렇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지조와 의지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애국심 앞에 그 누가 고개 숙이지 않으랴.
 
안중근의사 의거 당시 총알을 맞았던 남만주 철도의 간부 다나카 세이지로(田中靑次郞)는 훗날 "안중근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말을 남겼고, 중국의 '영원한 총리'로 존경받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40여년 전 안 의사의 거사에 대해 "중국 인민의 항일투쟁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격살로부터 시작됐다"며 그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하였다는 사실에서 안중근의사의 그 위대성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감옥을 감시하던 헌병 지바 도시지(千葉十七)는 안중근의사의 인격에 감동을 받아 일본으로 돌아와 매일 안중근의사의 제사를 모셨다고 하니 안중근의사의 인품 또한 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때 늦은 감이 있지만 1962년 안중근의사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치신 분에 대한 당연한 예우요, 귀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안중근의사 의거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그 업적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일제 암흑기를 겪은 세대보다 겪지 못한 광복 이후 세대가 많은 탓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될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안중근의사 의거는 재조명되어야 하며, 그로 인해 살아 퍼덕이는 우리 민족혼이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나갔으면 한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동
메인사진
[임영석 시인의 금주의 '詩'] 눅눅한 습성 / 최명선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인기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