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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도
비둘기의 발가락
기사입력: 2009/11/03 [16:52]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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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도 건영화학대표/울산지방법원조정위원
                                                                                                                
▲     © 울산여성신문
가을이다.  날마다 조금씩 가을이 더 짙어간다.   한 때 위용을 떨치던 잎들의 정열이 시들어 저마다 색깔을 달리한 모습이 아름다워, 산으로 산으로 사람들이 몰려간다.  
 
사람도 시들어진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인간은 그게 아니다. 잎들은 내년에 싹을 돋우고 다시 태어날 수도 있지만 인간은 그게 안되니까 슬프다.  
 
그리하여 때로는 비탈에 선 나무들보다 인간의 신세가 더 못하다는 생각도 자주든다. 인간들의 공격이 아닌 이상 늘 그 자리에 그렇게 멋지게 살아 있는거다.  

가을이라서 모두 좋은것만도 아니다. 바뀌어 가는 계절의 변화 때문에 감기, 비염, 신종플루 따위들로 콧물을 흘리며 심한 몸살을 앓는다.  
 
가족의 질병으로 종합병원 중환자실 문밖의 보호자 대기실에서 창밖을 내어다 본다.   창밖 사람들은 그게 아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벨소리가 조용하게 울리자 가운을 입은 의료진과 문안 온 사람들이 밖으로 줄지어 밀려 나간다.

옅은 바람에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밝은 표정의 그 사람들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마치 저쪽세상의 사람들 같다.  
 
대기실이 너무 지루해서 나도 자리를 뜬다.  한참 아래층 바깥 정원에는 분수가 힘차게 가을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온갖 생각에 잠겨본다.

내 마음이나 알아차린 듯, 한 무리의 비둘기떼가 코앞에 내려와 앉아 나에게서 먹을 것을 구하는 듯 곁눈질하며 서성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있는 나에게 놀라운 사실 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비둘기의 발가락이 네 개 라는거다.  
 
앞 발가락이 세 개, 뒷 발가락이 한 개, 내가 바보인 것을 오늘 처음 알게되는 순간이다.

그것보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발가락이 겹질려 비뚤어진체 걸어다니는 놈, 앞 발가락이 상처때문에 한 개 밖에 없는 놈, 발가락이 떨어져나가 아예 아무것도 없는 놈, 멀쩡한 놈들과 한데섞여 있지만, 장애 비둘기가 이다지도 많을줄은 정말로 예전에는 몰랐다.

하늘을 날때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땅바닥을 기어 다닐때는 얼마나 불편하고 경쟁력이 떨어질까 내가 비둘기가 아니라서 자세히 알 수 없는게 한탄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뛰고 걷고 날아다니기만 하는 비둘기라고 그저 그렇게만 알고 있었던 내가 정말로 바보같다.

사람이 조금 잘 산다고 해서 요즘 쌀값이나 전철차표가 얼마인지 모르고 무관심 하다면, 지체 높은 관리나 회장님이 국민들의 아픔이나 살림살이가 어떤지 전혀 짐작 못한다면 그건 죄악이다.  
 
군인들이 적진의 상황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다면 그건 패전이고 멸망이다. 의사가 환자의 아픔을 전혀 헤아리지않는 시술이라면, 성직자가 신도들의 고통위에 군림만 한다면 그건 싸가지없는 건달들 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  
 
단지, 남에게 직업이 고상하게 보일뿐, 존경할 가치없는 존재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들을 반성하거나 잘 뒤돌아 보지 않으려한다.  
 
뒤돌아 본다해도 지극히 짧고 간단할 뿐이다.   그동안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며, 꽃들이 피고지고 바람이 일고 비가 내렸다.

아무리 세상이 흘러가도 훌륭한 사람은 숫자가 드물어서 그렇지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고, 그들 때문에 세상이 이만치 굴러간다.

훌륭한 사람의 양식은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절제력에 있다.
모두가 다 그렇게 하찮을 것(?) 같은 벽 앞에서 존재의 이유는 무너져 내리고 만다.

어둠이 내리고 분수대 앞으로 다시 찾아가 앉았다. 낮에 보았던 그 많던 비둘기떼들은 모두 둥지를 찾아 사라지고, 소나무 정원수 사이로 노란 나트륨등 불빛이 스며 나온다.  
 
스며 나와서 조용히 나를 본다. 오래된 옛날, 노랫말처럼 목련꽃 피던 봄날 꽃그늘에 앉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젊어서 봄을 노래했지만, 이젠 나도 나이 들어 가을이 좋다.
단풍이 잔뜩 물감을 짜 낼 듯이 햇살이 내려 꽂히는 날에는 옛날처럼 멋내고 앉아 열심히 책을 읽고 싶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진실이 없음을, 올곧은 정의도 없고, 영원한 것은 더더욱 없음을, 지금은 나의 곁에 그대가 있고 그대 또한 나를 의지하여 위로 받고 있지만, 머지않아 나도 그대도 세상에 없음을, 설령 서로가 세상에 아직은 남아 있다해도 잊혀져 가다가 온전히 잊어 버리게 됨을, 몹시 아름다웠던 당신이 얼마나 멋있었던 우리가 어느날 보잘 것 없는 가뭄날 호박잎처럼 시들시들 해버린 우리를 서로 보게 되었음을, 그렇게 되리란걸 오래전부터 듣고 알고 있었을지라도 정말로 지금은 아름답지만 슬픈계절이다.

가을에는 무엇을 조금은 깨달아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는 계절이다.
엄벙덤벙 아까워하지 않은체  시간들을 넘겨 버린다면 내년 이맘때도 아무 진전도 없는 그런 나이의 우리들 일 뿐이 아니겠는가.

비둘기들의 상처를 통하여, 나는 작은 용기를 새로이 얻고 돌아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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