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장성운의재발견
중국 천지 순회하면서 자신 업적에 만족
죽음 두려워 불로장생 원했지만 50세에 타계
기사입력: 2008/01/21 [14:20]   울산여성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장성운 편집이사
 
 
▲     진시황릉은 무덤의 크기나 역사성으로 볼 때 중국의 중요한 유적지지만 복원이 너무 현대식으로 되어 고풍을 찾기가  힘들다.
육국을 평정했던 진시황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대책도 세웠다.

진시황이  중국 대륙을  통일 했지만 아직 북쪽에는 흉노가, 남쪽에는 백월이 건재했는데 이들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대륙통일을 하는 동안 잘 훈련된 군사를 이용 이들을 섬멸하거나 멀리 쫓아내었다. 그리고 이들 점령지역에 백성들을 보내어 살도록 했다.

이것도 부족해 그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은 한꺼번에 쌓은 것이 아니고 과거 그가 육국을 통일 할 때 곳곳에 쌓은 성을 연결한 것이다. 이렇게 해 진시황이 통치한 지역은 북으로는 황하의 음산과 요녕, 서로는 감숙, 남으로는 오늘날 베트남 북부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또 광활한 국토를 확장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점령한 지역을 신속히 돌아볼 수 있기를 원했다. 통일 후 대규모의 치도 사업을 그가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진시황 당시 수도 함양을 중심으로 중국 전역이 사통팔달했고 황제로 있는 동안 그는 이 도로를 이용해 전국을 여러 번 순회하면서 민심을 챙기고 자신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다.  요즘도 광막한 대륙 중국 어디를 가든 진시황과 관련된 얘기가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요즘은 옛날에 비해 교통이 크게 발달되었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된 요즘도 중국 전역을 돌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평생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3가지가 있는데 이중 하나가 국토가 하도 넓어 죽을 때까지 중국 전역을 모두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요즘에 비하면 교통수단이 열악했고 도로역시 좋지 않았지만 재임 동안 전국을 5회나 순회했다. 그는 지도상으로 보아도 먼 태산까지 직접 가 하늘에 제사를 올렸고 양보산에서는 땅에 제사를 지냈다. 또 추역산, 지부, 낭아산에는 자신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자신의 개혁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강한 자부심을 갖기도 했다.

이처럼 지상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그는 죽는 것이 두려웠다. 따라서 불로장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이 때 서복이라는 자가 상서를 올려 중국 동쪽에 삼신산이 있는데 이곳에 죽음을 초월한 신선이 살고 있다면서 이 신선을 만나면 인간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약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진시황은 실제로 서복에게 선남선녀 500명을 주면서 이들과 함께 삼신산으로 가 불로장생할 수 있는 약을 얻어 올 것을 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서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그는 기원전 210년 전국을 순회하던 도중 사망했다. 이 때 그의 나이 50이었다. 진은 시황이 죽은 후 급속히 쇠퇴해 그의 아들 대에 와서 망하게 된다. 천하 통일이라는 중국 역사상 큰 변화를 가져왔던 시황의 시대는 그러나 이처럼 짧게 끝났기 때문에 요즘은 흔히 진을 한(漢)의 시대와 함께 얘기를 한다.

그의 일생을 보면 그는 10여년 만에 육국을 통일했고 또 10여 년 동안 개혁정책을 벌여 국가의 기틀을 잡았을 뿐 아니라 당시 만들어진 많은 제도가 청나라 때까지 지속되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풍요로 왔고 국방이 튼튼할 수 있었던 것이 진시황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당시 분열되었던 육국을 통일한 요인으로 진시황을 보좌했던 주위 인물들의 영향도 컸겠지만 이 보다 진시황의 통치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이런 평가와 함께 진나라가 이처럼 급속히 망한 요인 역시 그에게 돌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진나라가 이처럼 빨리 망한 것은 진시황이 법제의 편리함만 알았지 다스리는 자가 갖추어야 할 지혜와 자비가 모자랐기 때문으로 풀이를 한다.

권력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과시 역시 진나라 단명을 재촉하는 요인이 되었다. 백성들은 전란이 끝나고 통일이 되면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렸던 평화의 날을 오지 않았다. 전란이 끝나자마자 진시황은 만리장성과 도로 개설, 나중에 가서는 아방궁까지 건립하는 바람에 백성들은 이들 사업에 동원되어야 했다. 게다가 방대한 사업이 이처럼 벌어지다 보니 백성들은 노역에 동원되었고 세금의 폭탄을 맞아야 했다. 실제로 아방궁 건설에만 70여 만 명의 죄수들이 동원되었다. 당시 국가에서 이처럼 벌이는 대형 사업에  차출된 성인의 수가 약 3백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당시 인구를 2천만명으로 보면 평균 한 가정에서 한명씩은 노역에 동원되었고 볼 수 있다.

당시 법을 보면 국법을 어긴 중범의 경우 노예가 되어야 했고 심지어는 다리의 절단이나 효수 등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감옥은 넘쳐났다.

 또 진시황을 닮지 못했던 아들 호혜의 행동 역시 국가를 위기로 몰아갔다. 진시황은 죽을 때 권좌를 장남 부소에게 물려 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환간 조고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호혜가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에 비해 모든 것이 떨어졌는데도 고집이 세고 잔혹하더니 재임 시 농민 반란이 일어났으나 이를 평정하지 못하고 나라를 내어주게 된다.

그런데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위해 보내었던 선남선녀 500명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을지가 궁금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복이 당시 얘기했던 삼신산의 위치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서복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그가 들어갔던 산이 지리산이었다면서 따라서 삼신산은 지리산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 보다 설득력이 있는 것은 제주도 한라산이다. 서복이 온 곳이 제주도였는데 제주도가 너무 아름다워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다가 죽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설득력이 있는 곳이 일본이다. 일본에는 당시 서복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서복을 신으로 모시는 사당만 해도 일본 전체에 6~7개가 있다. 이중 한곳이 요시노가리가 있는 사가현 지방으로 일본 문화가 시작되는 야요이 시대 중국에서 서복이 일본으로 와 농사짓는 법과 기타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 도배방지 이미지

중구 서안 여행기-서안 역사 6 관련기사목록
이동
메인사진
[임영석 시인의 금주의 '詩'] 눅눅한 습성 / 최명선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인기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