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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독도를 생각하며 대마도를 읽는다
[특별기획] 독도를 생각하며 대마도를 읽는다.17 - 태종, 선지를 통해 ‘다시는 조선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을 분명히 밝혀
기사입력: 2024/02/06 [12:25]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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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나라 영토이다. 일본이 억지를 부리면서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대마도정벌은 고려 및 조선 왕조에서 여말선초 시기 한반도를 침입하던 왜구의 주요 기항지 가운데 하나인 쓰시마 섬을 토벌했던 전쟁을 말한다. 

정벌은 총 3번 있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조선 세종 1년(1419)에 단행된 제3차 대마도 정벌을 칭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연호를 따서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부른다. 
울산여성신문에서는 일본의 억지주장을 일축하면서 우리 선조들의 대마도정벌을 통해 그 의미를 짚어 보고 대마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기획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울산여성신문 문모근 기자] 이에 조정에서는 글 내용이 공손하지 않다 하여, 사절을 예절대로 접대하지 아니하고, 그가 바친 예물도 거절했다. 

이로 인해 한때 양측의 갈등이 첨예해졌지만 결국 조선과의 교역이 끊어지면 손해보는 것은 자신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대마도주는 어쩔 수 없이 조선에게 예전처럼 조공을 바쳤고, 조선 역시 그동안 억류했던 왜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다만 태종은 대마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지를 보내 다시는 조선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이후 대마도는 조선의 속주가 되었으며, 이후 대마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너희들이 말로만 귀속한다 하나, 실은 성관을 들이지 아니하니, 우리는 경상 좌·우도 여러 포구에 있는 병선과 수군을 모아서 거제도에 나누어 수비시켜 도적의 변란을 대비하게 하고, 여러 포구의 수군은 부근에 있는 시위패(侍衛牌)로 대행하게 하겠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대마도 정벌은 조선 측이 독자적으로 진행한 것이 아니라 조선 조정에서 미리 일본의 규슈 쪽에 정벌의 뜻을 알리고 난 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조말생과 허조에게 명하여 일본국 규슈(九州)에서 사자(使者)로 보내온 정우(正祐) 등 네 사람을 제군(諸君)의 처소에서 대접하게 하고, 따라온 사람들은 배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보내라고 이르고, 우리나라에서 대마도를 토벌할 뜻을 말하되, 너무 놀라게 하지는 말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서 각각 따라온 사람들을 다 내세우니, 5인이므로, 임금이 옷을 주어 판관 최기(崔岐)로 하여금 압행(押行)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4권 1년 (1419년 기해) 5월 23일(정묘) 6번째 기사

 

이 정보를 들은 일본 측의 반응은 황족(皇族)인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伏見宮貞成親王)의 일기인 『간몬교키(看聞御記)』에서 드러나는데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무로마치 막부에선 이 같은 소식을 듣고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건 그렇고 지금 막 대당국, 남만, 고려 등이 일본을 공격해온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려가 알렸다고 한다. 무로마치도노는 매우 놀라셨다. 단 신국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간몬교키(看聞御記)』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막부는 조선의 예고를 듣고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대마도를 공격하는 나라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았고 명나라(대당국) 등도 공격의 주체로서 회자되고 있었다. 

 

물론 1419년 사건을 전후해서 명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요구하는 등의 사건은 있었지만, 직접 대마도 공격에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은 계속되어 이후에도 ‘대당봉기(大唐蜂起)’ (応永26年 6月25日), ‘당인습격(唐人襲來)’ (応永26年 6月29日), ‘사쓰마에 도착한 이적은 몽고라고 한다(薩摩ニ付異賊蒙古云々)’ (応永26年 5月23日) 등 명나라가 크게 의식되고 있으며, 그 호칭도 당(唐), 몽고(蒙古)라고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러한 용어의 혼동은 조선의 대마도 정벌이 1274년과 1281년, 2차례 있었던 몽골의 일본 습격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그리고 전황의 전모는 대마도 정벌이 끝난 지 두 달 후인 같은 해 8월에 규슈(九州)로부터 탐제주진장(探題注進状)이 도착하여 밝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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