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지역소식)
선거·정치상식 100배 늘리기-20. 우리나라의 선거제도의 유래-삼국시대
기사입력: 2006/01/20 [18:38]   울산여성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울산여성신문

: 삼국시대에도 오늘날의 선거제도와 비슷한 것이 있었나요?


: 우리의 원시공동체에도 씨족회의 종족회의 등 촌장이나 씨족장 같은 대표자를 선출하거나 해임하는 제도가 있었고 이후 삼국시대에는 아래와 같은 제도가 있었습니다.


(1) 백제의  정사암 : 백제시대 정치를 논하고 재상을 뽑던 곳으로, 백제 후기의 수도였던 사비(泗批:扶餘) 부근의 호암사(虎岩寺)에 정사암이라는 바위가 있어 국가에서 재상을 선정할 때 해당 자격자 3, 4명의 이름을 봉함하여 이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뒤에 이름 위에 인적(印跡)이 있는 자를 재상으로 뽑은 제도를 말합니다.
 
(2) 신라의 화백회의 : 그 기원은 원시집회소에 연유한 것으로, 국가체제의 성립에 따라 발달하여 처음에는 6촌(村) 사람들이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다가 뒤에는 진골(眞骨) 이상의 귀족이나, 벼슬아치의 모임으로 변하여 일종의 군신(君臣) 합동회의, 귀족회의, 또는 백관(百官)회의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수서(隋書)》<신라전>과 당서《(唐書)》<신라전>에 따르면 화백회의는 국가에 중대사건이 있어야 개최되고, 회의의 참석자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군관(群官:百官)이며, 또한 1명의 반대자가 있어도 의안(議案)이 통과되지 않는 다수결이 아닌 전원일치로 성립되는 회의체제였습니다.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자 전원의 의견을 수렴해서 결정한다는 화백회의의 정신은 후일 고려시대의 도당회의(都堂會議)인 도병마사(都兵馬使:都評議使司)회의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삼국유사》의 <진덕왕조>를 보면 이와 같은 국가의 대사는 경주 주위의 4영지(靈地)인 청송산(靑松山:東)·오지산(南)·피전(皮田:西)·금강산(金剛山:北)에서 대신들이 필히 참석해서 결정한다고 하였는데 이 회의가 화백회의와 관련되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3)고구려의 제가회의 : 고구려 때 주요 국사를 논의하고 심의겴품簫求?귀족회의로, 부족국가 시대이던 고구려 초기부터 행해졌습니다.
 
초기 고구려의 정치는 5부족 연맹체인 나부체제(那部體制)에 의해 행해졌는데, 이들 나부가 고구려 연맹체의 지배층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는 여러 부족의 장(長:大加·小加)들이 모여 중대사를 결정하였는데, 제가회의는 바로 이들 부족장들이 모여 국가의 정책을 심의·의결하던 최고회의를 말합니다.
 
회의의 의장은 초기에는 제가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가(相加)가 맡았고, 후대로 가면서 국상(國相:고구려 초기의 최고 관직)이 상가를 대신하였습니다.
 
주요 기능은 왕권 견제와 관련된 왕위 계승 문제, 대외 전쟁이나 정복 활동, 국가의 안위와 관련된 국사범들에 대한 평의(評議), 기타 국가의 중대사에 관한 심의·의결 등이었습니다.
 
5세기 무렵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구축되고 제가들도 점차 중앙귀족으로 편입되면서 제가회의의 기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제가회의 체제는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귀족회의로서 신라의 화백회의(和白會議), 백제의 정사암회의(政事巖會議)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출처 : naver.com)
 
▨자료제공 : 중구선거관리위원회 (☏296-3585)
  • 도배방지 이미지

이동
메인사진
[임영석 시인의 금주의 '詩'] 눅눅한 습성 / 최명선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인기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