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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단상
“평생 한 여성을 온전히 사랑할 자신이 없어 신부가 됐습니다”
기사입력: 2009/02/26 [21:00]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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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순 본지 발행인
▲     원덕순 본지 발행인
6,7년전 모 언론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신부가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 대한 김수환 추기경의 답변이었습니다. “제게도 젊은 시절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 갈등을 했습니다만 평생 한 여성을 온전히 사랑할 자신이 없어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는 일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신부가 됐다고 토로했었지요.

지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인 답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젊은 날의 갈등도, 이 세상에서 살면서 이루고자 했던 많은 사랑의 실천도 오롯이 가슴에 안고 말 그대로 나무묵주 하나 들고 하늘나라로 가셨네요.

카톨릭 신자인 필자가 추기경을 뵙는 것은 먼 발치에서 우리나라 카톨릭 교회의 최고지위에 있는 어른의 모습과 나라안이 시끄러울 때면 중립에 서서 중재나 충고를 하시던 성직자이자 어른의 모습으로 언론에서 뵈어왔었지요.
 
그럼에도 그 분은 많은 이들의 사랑과 믿음의 표상이었고  한국교회의 든든한 버팀목이었군요. 추기경을 떠올리면 다른 모습보다 언제나 같은 모습이라는 것. 가식없이 있는 그대로 사랑을 행하신 분이라는 것이지요.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는 옛말대로 가신 뒤에야 당신의 자리가 얼마나 크고 넓었는지 줄이은 국민들의 애도행렬이 말해주고 있네요. 평소에도 힘들고 가난한 이웃들의 친구여서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깍지마라. 그냥 돈을 주면 나태함을 키우지만 부르는 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 것이다” 말로만이 아닌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분이셨지요. 그 자리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고단한 현세에서 기댈 언덕이셨는데..

사랑의 소임자
남을 배려하고 챙기는 넉넉한 사랑의 실천자이셨군요.
그 사랑의 실천자이신 추기경의 또 하나 인간적인 말씀-“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칠 십년이 걸렸다” 참으로 진솔한 분이셨습니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은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와관용, 포용과동화, 자기낮춤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실천하시던 분이어서 커다란 등불 하나 사라지니 세상이 외롭고 아프고 쓸쓸하다고 국민들이 맘 아파 하네요.

김수환 추기경은 잘 알다시피 1922년 5월 대구 남산동에서 5남3녀중 막내로 출생하셔서 자라면  장사꾼이 되어 스물 다섯 살이 되면 장가를 가는 것이 꿈이었던 분이 성직의 길로 들어서 많은 이들을 보살피고 격동의 나라일로 고뇌하고 함께 아파하며 한국사에 한 획을 긋고 이제 향년 77세로 영면의 길로 가셨습니다.

 추기경의 일생 족적을 살펴보면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부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해 1951년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으며 1966년 5월 44세에 교황 바오로6세에 의해 주교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는데 1969년 3월 김구환 대주교는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셨지요.
 
그 당시 가장 영광스러운 최연소 추기경이었음은 그가 한국교회와 사회에 얼마나 큰 역할을 감당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혹자는 국가와 민생을 생각하는 그 분의 정치적 발언이나 노선에 대해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추기경은 혼란한 우리 시대의 충언자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시대의 양심가로, 거침없이 바른 말로 길을 밝힌 분이라고, 시대의 예언자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역사는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증명하겠지만 지금 우리는 사랑인 한 사람을 떠나보낸데 대해 아파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라”고 우리의 마음에 평화와 사랑을 선물하고 흙으로 돌아간 고 스테파노 김수환 추기경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겠습니다!” 라는 답변으로 사랑의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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