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사회/정치
눈 못감고 돌아가신 문옥주 할머니 명복을 빕니다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일대기 담은 책 출간
기사입력: 2005/08/04 [09:22]   울산여성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유성호 기자
▲ 생전의 고 문옥주 할머니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1940년 여름, 대구 시외버스정류장 근처를 걸어가던 16세 소녀가 일본군에게 납치됐다. 1944년 미얀마 전쟁터로 끌려간 소녀도 일본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1945년 천신만고 끝에 비로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미얀마에서의 악몽을 잊지 못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녀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알린 것은 1992년이었다. 다른 위안부가 모두 그랬듯 그녀도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받은 돈을 ‘군사우편저금’ 형식으로 일본 우정성에 강제 예치해야 했다. 그러나 광복이 된 뒤에도 일본정부는 이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1992년 그녀는 일본 정부에 자신의 군사우편저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아시아보상기금을 거부한다”

이 요구를 시발점으로 하여 일본정부는 태평양전쟁 당시 군인, 군속으로 일한 한국인들이 우정성 군사우편저금에 예치한 뒤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임금을 ‘마지못해’ 공개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부인하면서도 유엔인권위원회가 일본정부의 범죄인정과 법적 배상을 권고하자, 피해자에게 1인당 200만 엔의 보상금을 주는 ‘아시아평화국민기금’안을 제시했었다. 그러나 이는 정부 차원의 보상이 아닌, 민간기금으로 피해를 보상하는 것으로 책임회피일 뿐이었다. 그녀는 이 기금의 수령을 거부했다.

1940년 열여섯 꽃 같은 세월을 제국주의 침략군의 성노예로 살아야 했던 그녀의 이름은 ‘문옥주’이다. 대구의 허름한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살았던 문옥주 할머니는 평생을 가난과 병마에 시달렸다. 그녀는 생전에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문옥주 할머니의 성(性)을 착취한 대가로 일본정부가 주었다는 군사우편예금은 아직도 일본 우정성에 남아 있다. 엄연히 자신의 이름으로 예치되어 있는 그 돈을 문 할머니는 돌려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과거사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할 생각이라고는 없는 일본정부는 문 할머니를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 출신 여성들의 군사우편예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일본땅을 다 주어도 내 청춘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1992년 6월 1일, 도쿄지방재판소 제 713호 법정.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73세의 할머니가 증언대에 섰다. 그녀는 먼저 위안부 생활 때 일본군이 지어준 ‘가네다 기미코(金田君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당시 일흔이 넘은 나이에 유일한 생계수단인 파출부일이 신분이 드러나면 못하게 될까봐, 가발에 검은 안경을 쓰고 본명마저 밝히지 못한 채 법정에 선 할머니의 증언은 이렇게 끝난다.

“가족이 송두리째 파괴된 것은 물론, 몸도 마음도 다 썩게 되었습니다. 자식도 낳을 수 없고 결혼도 못하고, 평생 오갈 데도 없이, 떠돌아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평생을 웃음도 잃은 채 살아야 했던 그 한은, 하늘도 이해 못할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들의 문제도 해결하지 않은 일본이 어떻게 국제사회에서 활개를 칠 수 있겠습니까. 일본땅을 다 주어도 내 청춘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내 청춘을 돌려주십시오.”

이러한 증언을 해줄 수 있는 분들은 남과 북, 그리고 아시아 도처에 너무나 많다. 그 분들 중의 한 사람인 고(故) 문옥주 할머니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기록한 일대기가 책으로 발간됐다.

▲ ‘버마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모리가와 마치코 지음 /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 번역, 펴냄)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http://www.1945815.or.kr. 053-257-1431)’은 8월 1일 “광복 60주년을 맞아 고 문옥주 할머니의 삶을 기록한 <버마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를 8월 15일 출간한다”고 밝혔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애를 한 권의 책에 담은 ‘역사의 증언’ 시리즈로 지난해 출간된 훈 할머니의 일대기 <버려진 조선의 처녀들>에 이은 두 번째다.

<버마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이 책은 1996년 모리가와 마치코의 일본판 일대기를 ‘시민모임’이 한국어로 번역해 출간한 것이다. 저자인 모리가와는 이 책을 출간할 당시 일본에서 한국과 버마(현 미얀마)를 수십 번씩오가며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과 현지취재를 통해 완성했다.

한편, 시민모임은 오는 11일 오후 5시 대구 신혼프라자(구, 글라라웨딩 053-744-7494) 3층에서 원저자인 모리가와 마치코를 초청, <버마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일대기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일본군 ‘위안부’란?

일본군 ‘위안부’란 일제시대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반복해서 성폭행 당한 여성들을 일컫는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아들을 ‘정신대’라고 불러왔다.

일반적으로 정신대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44 년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부터였다. 이 법령에 의해 조직된 여자근로정신대는 원래 남성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여성까지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본래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일제 때부터 현재까지도 한국에서는 정신대를 곧 ‘위안부’라고 인식해 왔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여성이 일본군에게 끌려가면 곧 순결을 잃는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여성 중에 일본군 ‘위안부’가 된 이들도 있었다. 또 군 ‘위안부’가 된 여성들을 가리켜 정신대라고 부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이런 여성들을 ‘군위안부’ 혹은 ‘작부’, ‘창기’, ‘추업부’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런 용어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일본군의 입장에서 바라본 일방적인 면만을 보여줄 뿐, 피해자 측의 입장은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유엔 등에서 국제적으로 사용되는 ‘성노예(sexual slave)’, ‘성폭력 피해자’라는 표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모순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위안부’는 현재 역사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은..

1990년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면서, 그리고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였던 고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증언한 뒤 지금까지 약 200명에 이르는 피해자들이 정부에 신고를 했다.

1995년 2월 대구여성회에서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를 만들면서 지역에 계시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시작하였고, 학생, 교수, 변호사, 의사, 회사원 등 시민들이 뜻을 모아 1997년 12월 29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정식 출범시켰다. 이후 시민모임은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에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복지문제와 이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동
메인사진
[임영석 시인의 금주의 '詩'] 눅눅한 습성 / 최명선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인기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