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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아직도 5일장이 서는 서부지역의 경제 중심권
언양읍성과 지석묘, 김취려의 묘가 있는 곳
기사입력: 2006/11/14 [17:43]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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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주필

 언양읍은 울주군의 서부 6개 읍, 면의 중심지로서 고속도로를 통하여 울산으로 들어오는 관문이기도 하다.

 언양읍은 교통의 요충지 일뿐 아니라 울산 서부 지역의 경제 중심권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심불산, 가지산, 고헌산, 간월산 등 영남 알프스라며 뽐내고 있는 영산들이 많아 해마다 많은 등산객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  언양 장터의 활기찬 모습.

 옛날부터 이곳은 경관이 빼어나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이 이 고장의 경관 중 빼어난 명소를 골라 언양팔경(彦陽八景)이라 하여 노래했는데 이 언양팔경은 서광모설고헌산(瑞光暮雪高軒山), 구곡청절반구대(九曲靑節盤龜臺), 조망하무화장산(眺望下霧花藏山), 고색창연언양성(古色蒼然彦陽成), 수석침류작천정(漱石枕流酌川亭), 춘록추홍석남사(春綠秋紅石南寺), 요림비폭파래소(瑤林飛瀑波來沼), 석양낙조간월봉(夕陽落照肝月峰)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비교적 부분적이나마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언양성이 있고 고려 때 거란족의 침입을 막아 혁혁한 공을 세워 문하시중(門下侍中) 까지 벼슬이 오른 위열공(威烈公) 김취려의 묘가 있다. 또 서부리와 반곡리에는 원형이 잘 보존된 고인돌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러한 지석묘가 어느 나라보다도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이곳 주민들은 농업, 공업, 상업 등에 종사하는 인구가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신, 구 상권들이 공존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나그네들에게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울산에서 언양으로 가려면 자갈이 깔린 비포장도로를 우리들이 `언양 털털이`라고 불렀던 버스를 타고 20분이 넘게 가야했던 곳이다.
▲    언양가축시장. 요즘은 닭, 오리, 개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비가 온 후에는 도로 곳곳이 패여 흙탕물이 고여 있었고 버스가 이 구덩이를 지날 때면 버스 뒷좌석에 앉아있던 승객들은 엉덩이가 한참 튕겨 올라갔다 내려오는 요즘은 상상이 되지 않는 교통수단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타고 다녔다.
 언양은 장날이 2일과 7일, 이렇게 5일 간격으로 서고 있다. 언양 장의 유래는 정확한 것이 없지만 1919년에 발간된 옛「언양읍지」장시조(場市條)에 의하면 읍내장(邑內場)은 내시(內市)가 매월3차 7일과 외시(外市)가 매월 3차 2일. 그리고 신시(新市)가 매월 6차 4, 9일로 기록되어있으며 경주 양산, 동래, 청도, 밀양 등지의 외지 상인들이 모여들던 큰 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언양 장은 내시(內市)와 외시, 옛신시 장터 이렇게 3곳으로 분류되어 있다.
 내시(內市) 장터는 현재의 언양초등학교 정문에서 동부리 일대의 상북에서 내려오면서 교차되는 사거리와 여기에서 동쪽으로 뻗은 도로를 따라 동부리 157번지 일대의 아래 사거리까지와 남부리 273-2번지와 274-3번지 일대의 골목 일대가 장터로서 음력으로 매월3차에 걸쳐 7일에 장이섰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거래되던 주 상품들은 고헌산 고사리와 간월산 반달비, 곤달비와 신불산 도라지, 더덕, 가지산 버섯종류, 그리고 인근 야산의 산나물이었고 마늘, 고추, 파 등의 채소를 도로변에서 내다 팔았다.

 특히 남부리 273-2번지와 274-3번지 일대의 어물전은 당시 제일 큰 장터였는데 지금은 구매일시장과 유치원이 들어서 있다.

 외시(外市)는 바깥 장으로 남부리 340-1번지가 중심이 되어 동부리 157번지의 아랫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남천 제방까지 뻗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장이 섰다.
 외시에서는 가축시장도 섰는데 당시 닭전은 남부리 317번지로 현재 언양보건지소 일대의 골목장에 섰고, 솥전은 닭전과 마주보고 섰으며, 자리전은 닭전 입구 남천 쪽에 있었다.

 포목전은 남부리 340번지 일대, 나무전은 남부리 340-1번지 앞길에서 부터 남천제방까지 연이어있었다.

 우시장은 남부리 124번지 일대의 동편 쪽에 있었는데 여기에서 어음리 500-15번지로 1979년에 이전하였다가, 다시 삼남면 교동리 1132-7번지로 2002.12.11일 이전 하요 현재까지 있다.

 옹기전은 나무전 끝자락에 위치하여 옹기를 항상 철조망만 친 제자리에 두고 장사하였으나 아무도 가져가거나 해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옹기전을 해코지 하면 평생 재수가 없다는 속설(俗說) 때문이었으리라. 이 자리에 지금은 남부리 청년회관을 비롯한 각종 건물이 들어서서 현대식 점포를 형성하고 있다.

 옛신시(新市) 즉 옛 새시장터는 남부1리의 골목과 방천리 쪽 도로변, 그리고 남부2리 남천제방에서 경주 쪽의 북편길에 형성되었던 장터를 말한다.
 이곳 새장터는 하천부지와 미나리꽝이었는데 언양 면민들의 의무적인 부역으로 남천내의 돌과 자갈을 이용하여 이곳을 매축했다고 하는데 이곳이 오늘날 5일장의 주축이 되었다고 한다.

 이 옛 새 시장에는 안장터의 어물전이 옮겨와서 여기저기에 형성되어 파장 때만 되면 어물전 상인들이 술에 취해 흥청거리면서 부르는 노래소리가 흥겨웠다고 한다.

 우리가 어렸을 적만 해도 언양장은 울산장과 나란히 어깨를 같이 할 정도로 굉장히 큰 장이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방학 때에는 아버지의 자전거에 얹혀서 언양장을 자주 가곤 했었다.

 아버지가 언양장을 자주 찾으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언양에는 필자의 고모님 두 분이 살고 계셨는데 그 중 막내 고모님이 일찍이 고모부를 여위고 혼자서 2남1녀를 키우고 계셨는데 그 막내 고모님은 언양 장날이면 그 전날 집에서 손수 만드신 떡을 가지고 나오셔서 팔고 계셨다.

 유난히 정에 약하셨던 아버님은 언양 장이면 어김없이 자전거를 타시고 언양 장에 들러 고모님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시며 막걸리를 드시곤 하셨다. 그런데 파장 때에는 언제나 만취가 되셔서 고모님 집에서 자고 오시거나 자전거를 두고 언양 털털이에 얹혀 돌아오시곤 하였다.

 그 당시 언양 장은 파장 때가 되면 여기저기에서 상인들이 술판을 벌였는데 술이 얼근히 취한 상인들은 홍도야 울지 마라 란 유행가부터 시작하여 끝에는 항상 그들이 생명처럼 찾아다니는 장들이 꿰어있는 노래로 끝맺음을 하곤 하였다.

 "우루루 갔다 울산 장, 이장 저장 양산 장, 남창 남창 남창 장, 어정어정 언양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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