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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충절(忠節)의 명기(名技) 전화앵(花鶯)의 묘가 있어
이곳 백운산은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기틀을 구상하던 곳
기사입력: 2006/10/09 [14:09]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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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주필/시인

범서읍 두서면은 울산광역시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경주시의 내남면과 동으로는 두동면, 그리고 서쪽으로는 상북면과  인접해 있다.

 행정구역은  인보리, 서하리, 구량리, 차리 내와리, 복안리, 활천리, 미호리, 전읍리 이렇게 9개의 법정리와 39개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와 국도가 나란히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고 울산과는 약25Km, 언양과는 8Km 그리고 경주와는 약 24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두서면은 지리적 위치가 산간오지인 만큼 개발이 늦어져 타 지역에 비해 농사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가구가 많지만 최근에 전읍리 일대에 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이곳 주민들도 농사위주의 생활과 농공단지의 근로 소득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생활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 두서면 사람들은, 일찍이 삼국통일의 영웅인 김유신이 이곳에 있는 백운산에서 수련하면서 도인을 만나 비법을 전수 받아 삼국통일의 기틀을 구상했다는 전설과 신라의 화랑들이 마병산에서 기마술과 심신을 단련하며 충절과 신의를 키우며 덕목(德目)을 닦은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곳 두서면에는 이곳 주민들 조차도 그 존재를 잘 모르는 충절의 기녀인 “전화앵(巓花鶯)”의 묘가 있다.

이 묘와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옛부터 이 묘를 잘못 건드리면 마을에 화가 미친다 하여 이곳 활천마을 사람들은 앞 다투어 이 기생 묘를 돌보며 관리해 주어 그 득분으로 천 년의 긴 세월 동안에도 묘의 봉분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얼마 전부터인가 방치하여 잡풀에 덮여 무덤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던 것을 1996년 당시 KBS의 이양훈 팀장이 TV 프로그램인 6시 내고향의 취재 소재를 찾아 두서면 활천리 일대를 답사하던 중 동네 어른들로부터 이곳에 예부터 유명한 기생 묘가 하나 있다는 제보를 받고 그 기생 묘의 내력을 조사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는 동국여지승람 전55권에 기술된 전화앵의 묘가 있는 열박령은 “경주부의 남쪽 30리에 있다”는 기술에 주목하여 거리 측정을 해보니 경주성 성벽을 기준으로 보면 성벽에서 30리란 거리가 열박령과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 의문의 기생묘가 전화앵의 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묻힌 전화앵은 우리들이 아는 그런 기생이 아니라 만고의 충정을 지닌 희대의 기녀임을 동국여지승람 전55권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부터 기생들은 가무를 하는 유녀에서 유래되었다. 그 유녀에 관한 기록이 구체적으로는 없으나 전쟁포로 중에서 자태가 고운 여자나 가무에 뛰어난 여자를 뽑아 기녀로 활동케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뒤 기녀들은 양반들의 노리개 감으로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시(詩), 서(書), 화(畵)를 배워 이 방면에 뛰어난 기생들도 적지 않았다는데 전화앵도 이들 중 한 명으로 시(詩), 서(書), 화(畵) 뿐만 아니라 춤에도 뛰어나 그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성신여대 이현희 교수의 “조선명기열전”을 보면 전화앵의 나라에 대한 충절은 어느 고관대신들 보다도 뛰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조선명기열전에 따르면 전화앵은 고려에 의해 신라가 패망하자 신라의 고관대신들이 경순왕과 함께 개경으로 옮겨가면서 그들이 아끼던  전화앵에게 힘께 개경으로 갈 것을 권유하였지만 전화앵은 “대감들이나 개경에 가서 잘 사시오.
 
나는 여기서 영원히 신라를 지키겠소.” 하며 서라벌을 떠나 이곳 열박령에 들어와서 신라의 화려했던 영화를 회고 하면서 쓸쓸히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전화앵은 죽은 뒤에도 열박령의 신모(神母)가 되어 열박령을 넘는 나그네들을 지켰다고 이현희 교수는 기술하고 있다.

고려 시절에는 서라벌을 동도(東都 )라 불렀고 평양을 서도(西都)라 불렀는데 동도의 명기란 글이 그 당시에 적혀 있음은 고려 전국에 전화앵의 명성이 자자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해 준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충절의 기생은 논개 정도인데 이 전화앵의 우국충정이 논개에 비해 뒤떨어짐이 결코 없고 오히려 더 돋보이는데도 그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묻혀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울 뿐이다.

이 전화앵의 우국충정에 감복한 울산학춤을 보급하고 있는 김성수 스님이 뜻한바 있어 작은 규모나마 해마다 전화앵의 추모제를 열고 있는 것이 그나마 조금은 위로가 되는 듯 하다. 앞으로 이 전화앵의 기록을 좀 더 발굴하여 이 우국충절의 기녀 전화앵을 울주의 자랑으로 발전시켰으면 하는 욕심이 생긴다.

이 전화앵과 동시대의 문사(文士)인 김극기가 쓴 한 편의 시가 우리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김극기는 젊어서부터 문명이 높았고 문과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서 청풍명월을 벗삼아 초야에 묻혀 시를 즐기며 살은 위인이다. 명종 때 학행으로 한림원에 보직되었으나 얼마 후에 죽었는데 그의 문집이 150권이나 된다고 하니 그의 문명이 어느 정도인지 알만 할 것인데 전화앵을 그리워하며 지은 그의 시를 읽어보자.
 
충절(忠節)의 명기(名技) 전화앵
玉貌催魂隔世
空端只見層巓
神女雨收巫崍
麗人風斷洛川
雲學舞衫曳地
月偸歌扇當天
行客幾傷芳性
滿布紅淚泫然
 
아름다운 용모의 혼을 제촉해서 저 세상으로 떠가니
헛되이 하늘가의 바위벽만 바라볼 뿐이다.
신녀가 비를 모아 무협에 뿌리는데
아름다운 이여 , 그 바람은 낙천에 끊겼다.
운학무를 추던 소매는 땅에 끌리었고
월투가를 부르며 흔들었던  부채는 하늘에 닿았는데
지나는 길손이  그 아름다움에  마음이 상하여
손수건 가득 붉은 눈물에 젖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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