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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천당에 가면
기사입력: 2005/08/27 [12:43]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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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도

▲김의도(수필가 ·건영화학 대표 )     ©
천당에 가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등골에 땀이 흘러내리는 삼복의 무더위가 한창인 팔월 초 어느 날 경주부근 산골에서 있었던 무슨 교회 수련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어둠이 내리자 골짜기에서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매미 울음소리와 어우러져 합창을 하는 듯 정겹기도 해서 망설였던 처음과는 달리 이곳에 참 잘 왔다는 생각도 한순간 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강당에 모여 흥을 돋우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이 지나가고 서울에서  내려온 강사 목사가 등단을 했다. 프로필을 흘깃 보았더니 한국에서의 학업은 별로 소개된 바 없었고 이름도 생소한 미국의 무슨 신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내심 대학을 떨어져서 미국으로 갔었나? 그런 못된 생각도 잠시 들었다. 물론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금시 반성하기도 했지만. 삼십여 분간 약장수처럼 앞뒤 없는 우스갯소리로 시간을 죽이는데 속에서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귀한 시간에 왜 저런 알맹이 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끄는 가해서이다.
 
밑에 앉아 있는 우리들을 바보로 보아서 그런지 그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두 시간에 걸쳐 그는 외쳤다. 목사님을 사랑해라. 교회를 사랑해라. 소문을 좋게 만들어라. 뼈다귀 이야기는 대충 이랬다. 그런데 가장 큰 것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십자가 위에 피 흘리시며 인류의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이야기가 빠져 있었다.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 하나는 듣고 앉아있는 대부분 신도들의 표정이 밝고 만족한 듯이 보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두컴컴한 산길을 어렵사리 내려오면서 나 혼자만 이상한 인간인가해서 씁쓸한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그곳 수련장 숙소에서 며칠을 기거하는 모양이었다.
 
요즈음의 종교세미나 형태가 가끔 이런 경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하여 몹시 걱정된다. 조직의 활성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본질이 오도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신앙에 관한일은 세상의 잡다한 것들과 달라서 무엇보다 본질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무슨 음료수나 화장품회사의 영업전략 세우듯 신앙의 조직을 이끌어 가는 것은 몹시 위태로운 일이라 생각된다. 한마디로 그건 타락의 길이다.
 
어떤 의과대학 교수가 장수마을 찾아서 100세를 넘긴 노인들을 인터뷰하고 다녔던 이야기가 있다. 그 가운데 15세에 시집을 와서 46세에 홀로 되었고, 지금은 107세가 된 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교수가 물었다. "할머니 지금 누가 가장 만나보고 싶은가"라고. 대답은 조금 엉뚱했다.  여든이 넘은 아들도 아니고 손자의 손자도 아니었다. 사별한 지 60년이 되는 남편이 그립다고 했다. 그러고는 "나를 그리로 데려다 줄 거야?"라고 되물으며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 "천당 가면 만날 수 있을 랑 가 몰라"였다.
 
60여 년 전에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치는 할머니의 혼잣말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교수는 다시 물었다. "천당 가서 영감님 만나면 뭐 하실 거요?"라고, 이어 할머니는 "영감한테, 그동안 나 없이 혼자 어떻게 살았소? 라고 물어야겠어." 할머니의 말씀에 가슴 속으로부터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할머니는 죽은 남편을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언젠가 다시 만날 사람으로 기다리며  살았다는 것이 우리에게 던지는 감동이었다.
 
사람이 무엇을 믿고 의지하는 일이 신앙일 것이다. 우리가 믿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절대적인 그리움이 생략되어 있다면 그건 신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다. 지금 어느 종교가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하자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믿음에 대하여 믿음을 바로 잡자는 말일 뿐이다. 말하자면 '단팥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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