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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 김준호와 평강 손심심의 재피방
대포댁의 레시피 … ‘젓갈’ (3)
기사입력: 2020/07/28 [17:04]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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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호는 18세에 춘당 김수악 명인을 은사로 소리와 악을 배웠으며, 상징민속학을 전공했다. 해병대 484기이며, 2014년 1월 1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4호 국내 지신밟기 예능 보유자로 선정되어 인간문화재가 됐다. 

  손심심은 17세에 문장원, 양극수, 김동원 명무를 은사로 동래양반춤, 동래할미춤, 동래학춤을 시작하였고, 전통무용을 전공했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동래야류 전수조교이고 동래학춤 이수자이다. <편집자주>

 

 

젓, 젓갈은 각종 어패류의 살과 알이나 창자를 소금에 절여 삭힌 가공식품이다. 인류는 무더운 기후에 쉽게 상하는 식품들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염장이라는 기술을 개발했고 해산물이나 일부 육류를 이 저장 방식으로 발효시켜 ‘젓갈’이라는 새로운 맛에 눈을 떴다.

 

‘젓, 갈, 된, 간, 장’은 모두 소금의 맛을 뜻하는 고대어 [짭, 짠]을 그 모어로 한다. ‘젓’은 ‘절이다’라는 뜻이고 ‘갈’은 ‘입맛에 약간 짠맛’을 의미했다.

 

사실 과거 중세 유럽권의 음식은 그다지 요리가 발달하지 못했다. 육류와 빵. 치즈, 위주의 단순한 음식으로, 귀족은 선민의식으로 육류를 주로 구워 먹었고, 평민은 삶아 먹는 정도였다. 빵도 귀족은 속살이 흰 빵을 먹었고, 평민은 호밀로 만든 검은 빵을 먹었다. 거기에 후식으로 먹는 과일은 아예 귀족들만의 특식이었다.

 

거기에다 육류의 부산물로 만드는 소시지나 햄, 절인 생선, 무, 당근, 마늘 양파 같은 채소는 평민용 음식이었다. 

 

음식을 담는 접시도 없었고, 16세기 전에는 맨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물 대신 맥주와 와인을 곁들인 정도였다. 

그래서 다양한 재료와 향료로 갖가지 요리를 하는 동양의 요리는 중세 유럽인들의 신비한 선망의 대상이었고, 16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에 감자, 고구마, 호박, 옥수수, 토마토 등이 유럽에 전해졌다.

 

17세기 초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은 동양을 상대로 식민지 지배와 무역시장 개척을 위해 ‘The East India Company(동인도 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동인도 회사는 금, 염료, 무명, 홍차 같은 물품에서부터 후추, 커피, 사탕, 생강, 정향, 계피 같은 향신료 무역으로 유럽지역에 이 물품들을 비싸게 팔아 돈을 벌었다.

 

이 시기 동양에서는 하찮게 취급하던 커리와 홍차, 누들같은 음식이 유럽으로 건너가 값비싼 귀족 요리로 변신하여 매우 인기가 높았다. 

그중에는 아사아에서는 그냥 그런 밥 반찬과 양념으로 쓰였지만, 유럽으로 건너가서 값비싼 고급 조미료로 취급받는 젓갈도 해당 되었다. 그 젓갈의 이름은 바로 ketchup(케첩)이었다.

 

어패류로 만든 젓갈은 동아시아와 남아시아가 본 고향이었다. 당시 동인도 회사에서 수입해 간 생선 젓갈은 중국 남부지방의 타이완 해협을 끼고 있는 푸젠성 사람들이 주로 만든 ‘쾨챱’이었다. 푸젠성 지역은 고대 해양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 해양 무역의 중심지로 중국의 문화를 유럽으로 수출한 전초기지였다.

 

지금도 우리가 쓰는 ‘tea’라는 단어는 푸젠성에서 생산된 차가 유럽에 처음 소개될 때, 푸젠성의 방언 [테]에서 탄생한 말이다. 또 하나 ‘케첩’도 푸젠성에서 쓰던 말이 유럽으로 전해진 경우였다.

 

푸첸성은 고온다습한 남방 열대 해양성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토루(土樓)라는 독특한 원형 아파트형의 전통 가옥을 짓고 살았다. 강한 햇빛을 피하기 위해 흙과 목재로 벽을 3∼5층 높이로 쌓고, 담을 원형으로 두른 철옹성 모형으로 채광이 최소한으로 비치고 통풍이 원활하고 태풍이 비켜가는 구조로 출입문을 하나밖에 없는 방어형 성채였다.

 

그 둘레는 수백 미터에 이르고 큰 토루 하나에 일가 700여 명이 거주하였다. 토루의 안쪽으로는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견딜 수 있도록 우물도 여럿 있고 2층에는 화창이라는 규모가 큰 저장고가 있어 곡식이나, 발효식품들을 저장했다.

 

 이곳에서 천천히 발효시킨 생선 젓갈의 이름이 ‘쾨챱‘이었다. ‘쾨+챱’에서 ‘쾨’는 물고기를 가르키는 말로 우리말 남부지방 방언으로 생선을 ‘괴기’라고 하는 것과 맥이 같다. 

 

‘챱’은 소금의 맛인 ‘짭’와 같은 계통으로 ‘쾨챱’은 ‘생선 젓갈’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이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이민을 간 푸젠성 출신 화교들을 통해 유럽으로 전달되어 ‘케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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