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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진시황에 대해 부정적 시각
백성 혹사로 세운 만리장성 최고 유적지로 부상
 
장성운 편집이사 기사입력  2008/01/21 [15:07]

천하 통일 했지만  독재 정치로 민심 얻기에 실패
 
▲  진시황은 생전에 만리장성, 아방궁 등 백성들을 혹사하는 토목사업을 많이 일으켜 폭군의 이미지를 남겼는데 병마용갱 역시 진시황이 백성들을 혹사해 세운 대역사다.
진시황은 중국의 대명사다. 중국인들 대부분은 진시황을 성군으로 보지 않는다. 진시황의 이름에는 독재와 권력, 학정이 베어 있다. 이것은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타난 진시황의 행적 때문으로 풀이된다. 진시황은 태어나 50여년을 살았다. 진시황에 대한 사마천의 기록에는 진시황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권력을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정적들을 상대로 잔인하게 권력을 행사했고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짓고 통일 전쟁을 위해 국민들을 노예처럼 부렸던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인상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오늘날 중국에 가장 많은 관광수입을 올려주고 있다. 그가 학정의 상징이 된 것은 만리장성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백성들을 혹사해 쌓은 만리장성은 지금까지 인류가 세운 최대의 토목사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중국에 가장 많은 관광수입을 올려주고 있는 유적지가 만리장성이다.

진시황이 황제가 된 후 죽을 때까지 만들었다는 병마용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서안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도 병마용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병마용을 통해 그동안 중국 정부가 벌어들인 관광수입만 해도 5조원이 넘는데 앞으로 발굴이 더 이루어질 경우 관광수입이 얼마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병마용 전시관이 있는 섬서성 임동현에 가보면 관광객들을 위한 새로운 마을이 하나 생겨났고 이 마을을 중심으로 관광객들이 전시관으로 밀려들어가고 밀려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시황의 가장 큰 업적은 천하 통일이다. 그는 국토만 통일시킨 것이 국민들이 편히 살수 있도록 문자와 화폐, 도량을 통일하고 황제들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제도의 통일도 함께 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굴복시켜 중국 보다 훨씬 작은 한반도를 통일한 것이 이 보다 900여년 뒤인 것을 생각하면 진시황의 천하 통일은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한·조·위·초·연·제가 패권을 다투었던 시대 진나라 왕이 된 것이 13세 때였다. 이후 섭정에서 벗어나 대관식을 치루고 손수 국정을 처리하기 시작했던 때가 기원전 238년 그의 나이 22살 때였다.

이후 그는 태후를 연금하고 아버지 여불위를 파면하는 등 자신의 행동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들을 모두 제거하면서 통일 전쟁을 치러 230년부터 221년까지 10여 년 동안 6개 제후국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수립했다. 이 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천하를 통일한 그가 처음으로 한 것이 자신의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이 삼황보다 높고 오제보다 크기 때문에 삼황과 오제를 겸할 수 있는 호칭을 가져야 한다면서 시황제라 불렀다. 시황제는 그의 존호가 땅에서 인간을 다스리는 왕과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제라는 존호는 실제로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황제가 된 그는 자신이 통일한 국토에 대한 통치 제도부터 바꾸었다. 이에 대해 대신들 사이에는 이견이 속출했다. 어떤 대신들은 통일 전 실시되었던 분봉제를 그대로 지속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어 놓았고 일부 대신들은 6국의 토지를 왕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진시황은 이에 대해 결국 군현제를 실시해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음으로 그가 실시한 것이 문자와 화폐, 도량형의 통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워낙 국토가 넓어 지역간 문자와 화폐의 차이가 많아 백성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예로 문자가 서로 다르다 보니 북쪽지역 사람들이 남방 사람들이 쓴 글을 읽을 수 없었고 반대로 남방 사람들이 쓴 글은 북방인들이 해독할 수 없었다. 또 화폐 역시 달라 상인들은 장사를 하기 위해 가는 곳 마다 환전을 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문자와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 해 놓고 보니 편리한 점이 많았다. 우선 중앙에서 공문서가 지방으로 전달되면 공문서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 공무가 원활히 이루어졌고  또 화폐와 도량형의 통일로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이처럼 통일 국가의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힘썼던 진시황이 크게 잘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역사서를 불태운 것이었다. 진시황이 후세 사람들로 부터 욕을 들어먹는 것도 이런 행동 때 문이다.

진시황은 비록 6국을 통일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토의 통일이었지 백성들의 사상까지 통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서적을 불사르는 것이었다. 그는 그동안 진나라 역사와 사회 문제를  쓴 문헌을 제외한 다른 내용의 글이 들어 있는 책을 모두 불살랐다. 진나라 앞에 있었던 6국의 역사서가 모두 불타 중국 역사의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 이 때  부터다. 이것은 그가 참모 이사의 의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사는 과거 역사서를 불태움으로 백성들이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비교, 진시황의 잘못을 비난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 이런 조치를 내렸고 진시황이 이에 동의했다.

그는 역사서만 불태우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집필된 책 중 의약과 점술을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살랐다. 이런 조치가 내려진 상황에서 민간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몰래 감춘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다. 왜냐하면 책을 불태우지 않을 경우 벌이 크기도 했지만 당시만 해도 책을 종이가 아닌 죽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부피가 커 남의 눈에 띠지 않게 감춘다는 것이 어려웠다.

진시황은 이렇게 하면 역사에 대한 민중의 눈이 어두워져 자신이 펴는 정책을 반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전국 유생들은 이런 진시황의 정책에 반대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이러자 진시황은 유생들을 한꺼번에 산채로 땅에 파묻었는데 이 사건이 유명한 갱서분유다. 이 사건으로 그는 중국 역사서에 가장 표독한 독재자로 기록 되었고 중국 인민들은 지금도 진시황 하면 중국 역사에서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연상한다.         

그는 사상통일이라는 미명아래 책만 태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민중 반란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무기를 모아 이것을 녹인 후 사람의 동상을 만들어 이 동상을 함양 궁전에 세워 놓았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은 민중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힘을 통한 통일만 최고로 알았을 뿐 민심을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몰랐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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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8/01/21 [15:07]  최종편집: ⓒ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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