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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탐방하는 울산의 명승, 유적지 12
독립운동가 고헌 박상진(固軒 朴尙鎭) 의사
기사입력: 2022/06/10 [15:52]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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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보경 울산문화관광해설사     ©UWNEWS

 

難復生此世上 (다시 태어나기 힘든 이 세상에)

幸得爲男子身 (다행히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건만)

無一事成功去 (이룬 일 하나없이 저세상 가려하니)  

靑山嘲綠水嚬 (청산이 비웃고 녹수가 찡그리네)

 

이 시는 1884년 12월 6일 울산군 농소면 송정리(현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광복회(光復會)’ 총사령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시기 전에 남긴 고헌 박상진(固軒 朴尙鎭, 1854∼1908) 의사의 옥중 절명시이다.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고 자신은 독립운동을 한 죄로 피체되어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어 부끄럽다는 그 숭고한 정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박상진은 아버지 박시규(朴時奎)와 어머니 여강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지 백일 만에 큰아버지 시룡(時龍)의 양자가 되었는데, 만석지기 집안의 양부는 홍문관 교리에, 생부는 규장각 부제학에 이를 만큼 명망높은 가문에서 살뜰한 보살핌으로 올곧게 성장했다. 

 

1898년 15세에 경주 최부자로 유명한 월성최씨 집안의 최현교(崔鉉敎)의 장녀 영백(永伯)과 결혼 후, 사종형인 박규진을 따라 1899년 경북 청송 진보면에 은거중이던 왕산 허위(旺山 許蔿, 1854∼1908) 선생의 문하에 들어간다.

 

박상진은 스승인 왕산 허위를 통해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유생들을 만나게 되었고, 고종이 허위를 원구단 참봉에 제수해 상경하자 1902년 박상진도 상경해 다시 왕산에게 정치와 병학을 수학하다가 스승의 권유로 1905년 개교한 양정의숙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한다. 

 

1907년 왕산이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했을 때 박상진은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는 등 의병 활동을 지원했다. 

 

구한말 대법원장을 지내고 전국 의병을 총지휘해 서울 진격을 노렸던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가 1908년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자, 박상진은 독립운동으로 피해있던 장남 허학등을 대신해 스승의 시신을 수습해 금오산에 모시고 장례를 치렀다. 

 

1908년 안희제와 함께 양정의숙을 졸업한 박상진은 교남교육회에 이어 달성친목회에도 참여했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한일강제병합으로 식민지로 바뀐 조선에서 조선민을 재판하는 일제의 관리가 될 수는 없다며 사퇴했다. 

 

1910년~1911년 만주와 연해주를 둘러보고,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지원하기로 하고, 상하이 등지를 돌아본 뒤 귀국했다. 

 

박상진은 1912년 대구에서 곡물상 ‘상덕태상회’를 설립했고, ‘풍기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인사와 결합해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광복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중국의 신해혁명에서 목격한 것을 바탕으로 국권 회복을 위해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이라는 광복회 투쟁강령을 수립하게 된다. 놀랍게도, 광복회의 본부이자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락거점이었던 ‘상덕태상회’는 대담하게도 일제 치하 대구경찰서 코앞에 있었다.

 

충청도와 황해도에 이어 전국으로 조직을 넓힌 광복회는 1915년 12월 경주에서 일제가 거둬들인 세금을 운반하던 우편마차를 습격하기도 하고, 1916년 대구에서는 독립군을 양성할 군자금을 모집하다 발각되어 박상진등 9명이 체포되어, 박상진은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1917년 출옥한 박상진은 군자금 모금에 비협조적이고 친일 악덕 지주로 지탄받던 경북 칠곡의 부호 장승원(1917년 11월)과 충남 아산군 도고면의 악질면장 박용하(1918년 1월)를 처단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천안과 예산에서 회원들이 체포되면서 광복회 조직이 드러났고, 박상진도 노모의 상을 치르던 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박상진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향년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순국하셨다.

 

광복회 부사령이었던 이석대가 순국(1918)한 후, 총사령 박상진이 중국 동북지역에 파견했던 부사령 김좌진은 박상진이 피체된 후 광복회 조직이 와해되자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어 ‘청산리대첩(1920)’을 거두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의 막을 올렸다. 

 

또한, 1910년대의 비밀결사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단체였던 광복회는 총사령 박상진 의사가 순국한 뒤 조직이 와해 되었지만, 일제와 친일부호들을 공포에 떨게 한 비밀결사의 투혼은 ‘광복단 결사대’를 꾸린 우재룡과 권영만 등 남은 회원들이 이어갔다. 

 

이밖에도 광복회의 투쟁은 만주로 망명하여 ‘주비단’을 결성한 한훈과 김상옥으로 이어졌고, 김원봉의 ‘의열단’과 김구의 ‘한인애국단’으로 그 숭고한 의열 투쟁 정신이 이어져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고,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910년대 국내 민족운동 전선에서 혁명군을 양성해 유사시에 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추진한 강력한 무력투쟁 단체였던 ‘광복회’는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광복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독립’이라는 희망의 불을 이어가게 만든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시금석과 같은 역할을 한 단체라고 볼 수 있다. 

 

2022년 올해는, ‘광복회’를 이끌었던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의사’가 순국한 지 101주년이 되는 해이다. 

 

아직도 그에 대해 몰랐던 분이 있다면, 북구 송정동에 있는 울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의 생가와 역사공원을 방문해 그 숭고한 희생과 우국충정의 큰 뜻을 기리며 되새겨 보고 그의 서훈 등급 격상 운동에도 힘을 실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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