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획/특집
기행
[기행] 800km 산티아고 순례길 (28)
유서 깊은 오 세브레이로 성당을 지나 알토 데 포이오 고개까지
기사입력: 2022/05/13 [11:29]   울산여성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UWNEWS

 

 

[울산여성신문 정은주 객원기자] 새벽에 눈이 떠져 창밖을 내다보니 주황빛 가로등 아래 소박한 마을 길과 나지막한 집들이 고요했다.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 순례자들과 ‘부엔 카미노’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늘도 산길에다 오르막이 많아서 힘들 거라고 했다. 순례길 여정을 안내하는 한 장의 지도에는 카미노의 고도가 그래프로 표시되어 있어서 그날의 여정에 오르락내리락 경사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지치고 고단한 사람에게는 깃털 하나에도 무너질 수 있는데 괜히 한 장 더 올린 벽돌처럼 무겁게 시작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그저 한 걸음에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에 일부러 확인하지 않을 때도 많지만 들리는 정보까지 막을 순 없다.

 

마을을 나서니 산골짜기에는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서 곧 기지개라도 켤 것 같았다. 산기슭의 밭에는 아주 커다란 누렁 호박이 둥글둥글 익어있었고 초록 들판에 야생화가 피어있었다.

 

산길이면서 돌길이라 걸음은 더뎠고 피곤함도 더했는데 평소에 등산을 즐기던 사람들이야 거뜬하겠지만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만 열심히 한 나로서는 쉬운 산은 없었다.

 

자신감과 용기가 소심해질 때는 너무 몰아세우지 말자, 너무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스스로 다독였다. 내 안의 내가 병도 주고 약도 주니 나를 오롯이 받아들이기도 쉽지만은 않다.

 

오르락내리락 산길을 걷던 중에 갈리시아 지방임을 알리는 커다란 경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키보다도 훌쩍 큰 표지석을 한적한 산길에서 만나니 격려의 인사라도 되는 듯 돌 하나에도 반가워서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흔적이 있다는 건 누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증표가 되어 그 사람을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주하는 듯하다. 역사가 담긴 유물이나 유적에서 느끼던 야릇한 친근감을 이곳 카미노에서도 만나게 된다.

 

작은 마을을 여러 곳 지나서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 마을에 도착했다. 걸어올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많이 모여 있었다.

 

 

이곳에는 산타마리아 왕립 성당이 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로마 시대 이전 9세기에 지어졌다고 했다. 책에서나 읽던 로마 시대가 이곳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눈앞에서 확인하게 되니 천 년의 시간이 압축되어 툭툭 나타나는 듯했다.

 

이곳에는 ‘기적의 성배’가 있는데 그리스도의 기적이 나타난 곳이라고 했다. 눈보라를 뚫고 미사를 보러 온 가난한 농부에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 성체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기도문이 있었고 커다란 성경 두 권이 펼쳐져 있었다. 한 권은 점자로 된 성경책이었고 한 권은 반갑게도 한글본이었다.

 

펼쳐진 곳을 보니 시편 ‘순례의 노래’ 부분이었다. ‘내 도움은 어디서 오리오, 내 도움은 주님에게서 오리니’라고 쓰여 있었다. 성경의 깊은 뜻을 내가 알 리 없지만 ‘깊은 산속 옹달샘’이 연상되어 맑은 기분이 들었다. 기념엽서도 판매하고 있기에 몇 장 사서 넣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산길이 이어졌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걸릴 것 없이 하늘 아니면 땅이었던 메세타 지역에 비하면 이곳은 굽이굽이 산이며 돌고 돌아 산길이었다. 오르막이나 모퉁이를 돌아설 때면 부디 또 오르막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파울로 코엘료가 산티아고 길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길이라고 했다더니 나는 평범한 사람 중에서도 형편이 나은 편이 아니어서 그저 이 길에서 엎어지지 않고 가는 것만으로도 기특할 지경이다. 소심해진 용기는 고개를 숙이기 일쑤였고 여지없이 펼쳐진 오르막 앞에서는 심호흡을 해야 했다.

 

이곳 순례길이 종교인만의 길이 아니라 나처럼 무 신앙자라 하더라도 체력의 한계를 의식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어떤 형식이로든 정신적 수행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이오라는 고개는 1300m 고지의 가파른 곳이라 오르는 동안 숨이 차고 힘들었다. 한 발자국이 마지막이라 여기며 겨우 한 걸음씩 옮겨 드디어 알토 데 포이오(Alto do Poio) 고개에 도착했다.

 

높은 곳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고갯마루에 올라설 때는 어찌나 경사가 가파른지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 호흡만 헝클어지지 않으면 숨이 차지 않을 건데 그러지 못했다.

 

마지막 체력을 쥐어짜듯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격려의 인사를 건네 왔다. 그 사이 체력이 충전된 건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 힘든 걸 해내고도 저리 기운이 남아있을까 싶어서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잘나서 잘하는 사람이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잘나지 않았지만 해내려는 사람을 응원하고픈 걸 보면 자기 연민을 투영한 게 아닐까 싶다. 카미노에 서니 후줄근한 나의 체력이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산 아래로 보이는 아름다운 경관을 보며 우리도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카페 겸 알베르게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들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난로 곁에 옹기종기 모여서 쉬고 있노라니 참으로 아늑한 가운데 하루가 저물었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동
메인사진
[임영석 시인의 금주의 '詩'] 눅눅한 습성 / 최명선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인기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