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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탐방하는 울산의 명승, 유적지 4
외솔 최현배 기념관(1)
기사입력: 2022/01/20 [16:34]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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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문화관광해설사 정덕모     ©UWNEWS

외솔 최현배 기념관은 황방산이 남쪽으로 내리뻗은 자락에 조선시대 축조된 병영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 기념관은 여러 고증을 통해 생가와 전시실, 사무실, 수장고 등으로 2003년에 착공하여 2010년에 개관하였다. 2011년 9월에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으며, 외솔의 동상은 같은 해 11월에 제막되었다.

 

외솔은 기념관이 있는 생가에서 1894년 아버지 최병수와 어머니 박순화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생가 바로 옆에 있는 일신학교(현재, 병영초등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특히 바둑과 산수를 잘했다. 

 

7살에 아버지를 여위고, 1910년 한일합방 되던 해 상경하여 한성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짚신을 신고, 울산에서 양산(물금)까지 오십 리 길을 걸어서 경부선 기차를 탔다. 당시 모집인원이 1백명이었고, 이 중 25명은 시 도 추천생이고, 나머지 75명은 시험으로 뽑았는데 지원자가 1천2백이 넘었지만 최우수 성적으로 당당히 합격 하였다.

 

8월에 나라가 망하고 교장선생도 일인(日人)으로 바뀌고, 교명이 경성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고등학교)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우리 민족을 위한 공부를 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품게 될 쯤에 김두봉의 안내에 따라 일요일마다 보성중학교에서 열렸던 조선어 강습원에서 주시경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인연은 소년 최현배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 계기가 되었다.

 

외솔과 김두봉의 관계를 알아보자. 1890년 기장에서 태어나 외솔보다 먼저 주시경의 문하에서 한글을 배우고 있었으며, 나라 잃은 슬픔과 일인 교육에 대해 실망한 외솔을 주시경에게 한글을 배우게 인도했다. 그는 기호학교(현재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주시경 사후에 조선어 강습소 일을 맡았다.

 

「말모이」편찬 사업에 참여하고, 1916년 「조선말본」을 출판하여 한글연구에 앞서갔다. 1919년 중국으로 망명, 1922년 「깁더조선말본을 펴낸 이후 정치에 뛰어들었다. 해방 후에는 북조선 노동당에 가입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 의장과 조선 임시헌법 초안제정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으나 1958년 숙청돼 1960년에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방어진 출신 김천해와 김두봉은 북에서 고위직의 임무를 맡았다. 

 

 

다음은 주시경과 외솔과의 관계를 알아보자. 외솔의 인생에 획기적인 영향을 준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에 출생하였다. 주시경 역시 인생의 변환점이 발생하였다. 주시경 선생이 12살 되는 1888년에 큰아버지(일부, 중부라고 함)에게 양자를 들어 서울로 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한학만 공부하던 주시경은 1894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식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1896년 이준, 윤치호, 이승만, 이동녕 등과 함께 독립협회 조직에 참여하여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발간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때 서재필에게 발탁되어 독립신문사 회계사무원 겸 교보원이 되었다. 1908년 한글학회의 전신인 국어연구학회를 창설하였다. 이때부터 청년 학생들에게 배달겨레의 정신과 사상을 일깨우는 강의에 열성을 쏟았다. 

 

주시경에 의해 조직한 국어연구회를 시초로 1911년 변경하였다가 1913년 한글모로, 1921년 조선어연구회는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1931년 조선어학회로 변경되었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1949년 한글학회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당시 울산 출신의 서울 유학생들은 간발의 차이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송정동의 박상진은 1910년 양정의숙을 졸업하면서 이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그해 최현배는 한성고등 보통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1913년 최현배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자퇴를 하고 울산에 머물 때, 강동의 박관수는 한성 고등보통학교 사범과 1년 과정에 입학하였다.

 

외솔의 발자취에 대하여 알아본다. 1926년 4월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38년 9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파면당할 때까지 재직하였다. 1941년 5월 연희전문학교에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임하고 1945년 광복까지 옥고를 치렀다. ‘구락부’란 ‘Crub’를 일본어로 발음한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김영삼 정부 때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로 문화재를 재점검하였을 때 어휘의 표기를 바로잡지 못한 것으로 애석하다. 외솔은 일제로부터 한글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감옥살이를 하였다.

 

1945년 9월부터 1948년 9월까지와, 1951년 1월부터 1954년 1월까지 문교부(현재, 교육부) 편수국장에 두 차례 재직하였다.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문과대학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하고, 1961년 정년퇴임으로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4년 3월부터 2년간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20년간 계속하여 한글학회와 한글 관련 단체 등을 이끌었다.

 

흥업구락부 사건은 이승만의 독립 노선에 따라, 신흥우·이상재 등이 조직한 항일비밀 결사 단체이다. 1924년 기독교청년회 간부협의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신흥우는 귀국길에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이승만 중심의 독립혁명동지회와 안창호 중심의 신민회가 각 각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25년 신흥우 등 9명이 흥업구락부를 조직하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친목 단체로 이름을 위장했으나, 미국이 이승만과 연결되어 있어 일제의 주목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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