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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800km 산티아고 순례길(20)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전쟁을 겪은 곳, 중세와 현대가 자연스레 어울린 레온(Leon)”
기사입력: 2022/01/06 [11:42]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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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주 객원기자     ©UWNEWS

  새벽 4시경에 잠이 깨어 보니 창밖으로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게 살며시 일어나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바람은 한 점 일렁임도 없고 마을 전체가 고요하여 세상이 참으로 아늑했다. 두 팔을 벌려 가만히 별을 껴안아보았다. 이토록 평온할 수 있으니 감사했고 모두가 잠든 밤에 나 홀로 받은 선물 같았다.  

 

  25km를 걸어서 레온(Leon)까지 가기로 하고 동틀 무렵에 길을 나섰다. 팜플로나, 부르고스와 함께 산티아고 여정에서 만나는 대도시로 레온 지방의 중심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시라고 한다. 큰 도시에서는 구간을 나누어 떠나거나 새로이 합류하는 이들로 하나의 정류장처럼 붐비기도 하니 오늘도 그렇겠다.    

 

  어제와 비슷한 평원도 이어졌고 낙엽이 쌓여 사그락사그락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걷기도 했다. 황금색과 갈색이 어우러진 빛깔이 가을 풍경을 더없이 운치 있게 해주었고 고풍스러운 멋이 깃든 다리 아래로 처연히 흐르는 개울도 몇 군데 지나왔다.  

 

  가는 동안 마을을 지날 때마다 스틱 살 곳을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더 지체했다. 15km 정도 걸어서 가게를 찾았을 때는 어찌나 반갑던지. 딸의 스틱을 나눠서 짚고 다니는 동안 한쪽 다리를 빌려서 다닌 듯해서 미안함과 답답함이 있었는데 한순간에 뻥 뚫리고 해결됐다. 

 

  의지하는 것이 나약함과 창피함이라고 여겼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주는 것뿐만 아니라 잘 받는 것도 배워가야겠다. 가격도 양쪽 합쳐서 14유로라 첫날 생장에서 샀던 스틱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다시피 맑고 바람도 거의 없는 날씨여서 낮이 되면서 더웠다. 배낭을 내려놓으니 이마와 등에 땀이 축축했다. 어느 곳에는 길가에 기부제로 운영하는 아담한 좌판이 있었다. 마침 출출하던 차였는데 예상치 않은 배려를 만나니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도착 이전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한 시간가량 걷다 보니 언덕 아래로 레온이 한눈에 잡히지도 않을 만큼 좌우로 넓고도 길게 펼쳐졌다. 레온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금을 로마로 보내기 위한 로마군의 중요한 야영지였다고 한다. 

 

 

 

  고트족이 지배하다가 한때는 무슬림이 지배하기도 했다는데 중심지를 향해 들어오다 보면 이중으로 된 성벽이 아직도 남아있는 걸 볼 수 있다.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전쟁을 겪은 곳이 어디 이곳뿐일까만 지금 무사히 살아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가 싶었다.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이어져 있어서 우리가 묵을 알베르게를 찾느라 조금 헤매긴 했지만 친절한 할아버지께 도움을 청하여 찾아갔다. 대기하는 줄이 늘어서 있어서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방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순례자들로 북적북적했다. 복잡하기는 다른 알베르게도 사정이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알베르게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레온 대성당을 둘러보기로 하고 좁은 골목을 벗어나자 광장과 고딕 양식의 안정된 첨탑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1인당 6유로를 내고 들어가니 아름답고 우아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에 눈을 떼기 어려웠다. 대성당 안에 아카펠라 성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둘러보는 중에 이스라엘에서 온 로즈를 다시 만났는데 그녀는 오늘 레온을 마지막으로 하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작년에 딸과 여기 레온에서 산티아고까지 다녀갔기에 이번에는 앞쪽 구간을 걸었다고 했다. 만남이 그랬듯 헤어짐도 산뜻한 산티아고 순례 길이니 우리는 서로 꼭 안아준 뒤 웃으며 헤어졌다. 

 

  대성당 앞 광장에는 어린아이들이 여기저기서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듯한데 이런 곳이 놀이터라니. 중세와 현대가 자연스레 어울려 있는 곳, 종교적 예술적 역사적 분위기 물씬 품은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뛰어놀 수 있는 이들의 환경이 부럽기도 했다.

 

  중심가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고 있었다. 노천카페에는 현지인들과 여행자들이 섞여서 저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제까지도 한적한 메세타 길을 걷다가 도심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들뜨고 분주한 움직임이라 조금은 낯설게 다가왔다. 

 

  골목을 누비다가 한곳을 보니 중고서적이며 골동품을 파는 벼룩시장이 있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다가갔다. 아주 오래되어 표지가 가죽으로 되었는데도 다 닳아진 책이 눈에 띄어서 펼쳐봤다.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니 성경책인 듯했다. 그 옛날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들, 대를 물려 이어왔을 그 손길과 악수한 듯한 착각에 잠겼다. 

 

  문득 김소월님의 시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옛이야기 듣는가’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 알지 못하는 때에 일어난 역사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리고 나의 역사는 또 어떤가? 책 한 권을 앞에 두고 또 상념에 빠진 나를 옆에 있던 딸이 깨워주고서야 퍼뜩 정신이 들어 발길을 옮겼다. 

 

  근처 카페에서 저녁을 여유롭게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우리와 같은 방을 쓰는 젊은 남녀가  데이트를 하고 들어왔는데 못다 한 밀어가 있는지 소곤소곤 깨가 쏟아졌다. 알고 보니 오늘이 결혼 2주년 기념일이라고 해서 기꺼이 축하해 줬다. 덕분에 오늘 밤은 고소한 분위기에서 잠잘 수 있을 듯했다. 

 

  일찌감치 자려고 누우려니 머리맡에 벗어둔 모자에는 노란 들국화가 꽂혀 있고 순례 길의 노란 화살표 마크도 선명했다. 장거리 도보라서 고행길이 따로 없다 싶을 정도로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만은 꽃길로 향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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