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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800km 산티아고 순례길(12)
“추모의 마음을 담아 매어 둔 각양각색의 작은 깃발의 소원들이 전쟁 없는 평화의 세상 메시지가 되길....”
기사입력: 2021/06/28 [14:4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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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여성신문 정은주 객원기자]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알베르게를 나서기로 했다. 이곳 호스피탈레로는 알베르게에 함께 묵는 것이 아니라 출퇴근을 하기에 나가면서 앞쪽 출입문을 잠근다고 했다. 그래서 어제 미리 오늘 아침에 뒷문으로 나가는 방법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알베르게를 관리하는 호스피탈레로는 출퇴근을 하는 봉사자도 있고 외국인이 지원하여 상주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모두가 종교인이어야 하는가 싶어 조건을 물어봤더니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 길을 완주한 경험이 있어야 하고 영어와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알면 되고 주된 일은 알베르게 청소와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일이라고 했다.

 

  엊저녁에는 알베르게에 묵은 순례자들 중 저녁을 신청한 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하였는데 같은날 한 공간에서 먹고 자는 인연으로 쉽게 친숙해졌다. 커다란 접시에 놓인 음식들도 어느새 비워졌는데 아무래도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을 배려한 메뉴로 준비한 듯했다. 우리나라 음식과는 많이 달랐지만 야채를 맛있게 볶거나 닭고기로 만든 요리도 있어서 오히려 특별하고 맛있었다.

 

  우리가 일어났을 때 역시나 부지런한 순례자들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딸과 나는 휴대전화의 라이트를 비추며 2층에서부터 이어지는 공간과 문을 몇 개 지나서 뒤뜰로 나갔다. 마치 커다란 성에 있다가 누군가 귀띔해준 비밀의 문을 빠져나온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의 노정은 전날에 비해 오르내리는 길이 많아서 어렵고 힘든 길이라 했는데 야무지게 걸어보기로 했다. 새롭게 만난 한국인 중에는 서울에서 온 아버지와 아들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아들과의 여행을 위해 휴가를 냈다고 했다. 일산, 부산 등에서 온 분들도 그렇고 모두 걷는 속도가 빨라서 인사만 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순례자들 중 하루에 40km 넘는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있지만 끝까지 가고 싶다면 자신의 페이스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사실 동행하는 딸의 페이스에 맞추려니 버거웠긴 했지만 두 다리의 아우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이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산을 오르는 동안에는 산 아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호흡도 점점 헝클어지고 숨이 거칠어졌는데 잠시 멈추고 쉬면 좋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고 사진 한 장을 찍는 것도 포기하고 묵묵히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내딛는 데만 집중하며 걸었다.

 

 

  산 정상에 올라가니 ‘1936’이란 표시가 있는 기념비가 있었다. 평화를 상징하는 흰 비둘기 그림이 새겨져 있는 안내 명판이 있었다. 스페인어로 되어 있어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세계대전에 희생된 분들을 기리며 세운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추모의 마음을 담아 매어 둔 각양각색의 헝겊들이 작은 깃발처럼 매달려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가비도 걸려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하는데도 전쟁은 왜 여전히 끊이지 않는 건지 안타까웠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는 분들도 있는데 나는 여행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에 어쩐지 송구한 마음이 들어서 돌 하나를 돌탑에 올려두고 희생된 분들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전쟁이 없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잠시 묵념을 했다.

 

  다시 완만한 숲길이 나왔는데 이곳에는 바닥에 돌을 모아서 만든 화살표나 하트 모양 등 다양한 메시지를 표현해 놓았는가 하면, 장승처럼 세워둔 나무와 그림이 그려져 있고 거기에 순례자들이 써 둔 이름이며 남긴 글귀까지 있어서 산중 작품전에 초대받은 듯했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미 지난 시간의 사람들의 흔적임에도 동역 자들처럼 여겨져서 힘이 되었다. 딸에게 “우리도 다음에는 유성펜을 가져와서 뭔가 써 볼까?” 말했다가 뒷감당 안 되는 발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음은커녕 바로 앞에 놓인 한 걸음 30센티미터도 감지덕지였다.  

 

  숲길을 지나는가 싶더니 드문드문 나무가 있는 언덕을 지나기도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드넓은 하늘과 평야가 이어졌다. 한적한 곳에서 방목되는 소들이 하품을 하며 한가롭게 누워 있었다. 위풍당당한 자세로 서 있는 말도 있는가 하면 저 멀리 언덕 위에서는 한 마리가 머리를 숙이고 풀을 뜯고 있는데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너무나 평화롭고 안락하게 보여서 좁은 축사에서 사료를 먹고 있는 수많은 소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을 정도였다.

 

  한 걸음씩 내디뎌 드디어 오늘 묵을 마을인 아헤스(Ages)에 다다르니 산티아고까지 518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오늘도 해냈다’며 서로를 향해 축하했다. 토닥토닥, 지금까지 300km나 걸었다.  

 

  알베르게에 들어서니 머리를 뒤로 묶은 인상 좋은 호스피탈레로가 한국어로 인사를 하며 “정말 좋아요”라며 양쪽 엄지를 세우며 맞이했다. 우리도 반가워서 물어보니 한국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배웠다고 했는데 스페인어 인사말도 가르쳐주었다. 근처에 있는 성당 미사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권하는데 너무 피곤하여 그러지는 못했다. 오늘의 산티아고에 감사하며 이쯤에서 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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