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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인간문화재 ‘온달 김준호’와 ‘평강 손심심’의 재피방 - 문종이 바르기2
 
UWNEWS 기사입력  2021/02/04 [13:07]

 

김준호는 18세에 춘당 김수악 명인을 은사로 소리와 악을 배웠으며, 상징민속학을 전공했다. 해병대 484기이며, 2014년 1월 1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4호 국내 지신밟기 예능 보유자로 선정되어 인간문화재가 됐다. 

손심심은 17세에 문장원, 양극수, 김동원 명무를 은사로 동래양반춤, 동래할미춤, 동래학춤을 시작하였고, 전통무용을 전공했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동래야류 전수조교이고 동래학춤 이수자이다. <편집자주>

 

  비단의 수명은 오백 년이지만 한지의 수명은 천 년을 간다는 ‘지천년 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라는 말이 있다. 한지는 은은하고 부드럽지만 강인한 내구성으로 질긴 생명력이 있었다.

 

  1966년 석가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한지 두루마리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무려 1200년 전에 목판으로 인쇄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었다. 이 유물은 거의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뛰어난 목판 인쇄술과 천 년이 지나도 수명을 잃지 않는 한지의 모습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우리 선조가 만든 닥종이의 인기는 대대로 인근국에 소문난 명품이었다. 신라에서 생산된 신라지는 섬세하게 빻고 물에 잘 풀어 도침질을 잘 해서, 지면이 질기고 고르고 하얗다.

 

  당나라에서는 ‘천하제일 백추지(白硾紙)’라 불리며 뇌물로 쓰일 정도로 가치가 대단했다고 한다. 송나라에서도 왕에게 올리는 문서는 고려 종이를 썼다고 하고 원나라에서도 불경 편찬을 고려 종이로 했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청나라가 조공으로 너무 많은 조선종이를 요구하여 사찰의 승려들이 시달리기도 했다.

 

  이탈리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는 평생 가난한 자의 친구로 살다 간, 성 프란체스코 성인이 직접 양피지에 적은 카르툴라(Chartula)라는 국보급 유물 기도문이 있다.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주여 나를 당신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로 시작하는 이 기도문은 가톨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보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양피지의 이 기도문은 아무리 특수 보관을 해도 800년이란 세월을 이기지 못해서 복원이 필요했다.

 

  이탈리아 문화부의 권위 있는 지류 복원 기관인 ‘도서 병리학 연구소’는 카르툴라 복원사업에 착수하며 세계의 우수 종이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원래 유럽의 지류 문화재 복원 시장은 ‘일본 화지’가 독점하고 있었다.

 

  도서 병리학 연구소는 1200년 전의 인쇄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주목했다. 그리고 좀만 약간 쓸었을 뿐 까만 글씨체가 그대로 살아있는 경이로운 이 닥종이를 면밀하게 연구하였다. 2016년, 실제 복원작업에 들어간 연구소는 견고한 장력으로 보존성이 좋고, 우수한 통기성과 항습기능이 강한 ‘의령 한지’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 후, 지류 유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바티칸 교황청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도 ‘전주 한지’를 복원지로 선택하며 한지를 보존성이 뛰어난 고품격 종이’라고 인정했다.

 

 

 

 

  문종이를 바를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풀을 쑤는 일이었다. 할무니는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밀가루 풀 솥을 주걱으로 휘휘 젓고 계셨다. 아침밥을 먹고 우리 가족은 방안의 세간살이를 마당에 덕석을 깔고 날랐다. 먼저 시꺼멓게 탄 장판지를 깨끗하게 걷어내었다. 그리고 문짝에 붙은 묵은 종이를 뜯어내고 네모진 띠살 격자 사이의 먼지를 털어내고 쩌귀에 기름칠도 했다. 

 

  노란빛이 도는 장판지는 종이를 여러 겹 합해서 두껍게 하여 들기름을 먹여 건조 시킨 것으로 두꺼워 방수성이 좋고, 질겨서 칼질도 잘 먹이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 장판지는 방바닥에 맞게 잘라, 솔에 풀을 잔뜩 묻혀 바르고 방 빗자루로 살살 달래며 붙였다. 마지막으로 자투리 종이를 잘라 이음과 가장자리에 한 겹을 더 바르면 쉽게 끝났다.

 

  문종이는 주로 조히, 창호지, 조선종이, 참종이, 닥종이로 불렀다. ‘한지(韓紙)’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이후 유입된 서양종이 ‘양지(洋紙)’에 대한 반향으로 생긴 말이다.

 

  문종이도 문짝에 맞게 꼼꼼하게 잘라 붙이는데, 할무니와 어머니가 풀을 먹은 문종이를 맞잡고 먼저 물을 입에 물고 문살에 뿜었다. 그리고 풀먹은 문종이를 위에서 아래로 갖다 붙이면 할부지가 한 번도 안 쓴 수수 빗자루로 아래로 달래듯이 쓱쓱 붙였다.

 

  어머니가 기거하는 작은 방 위쪽 양쪽 문짝 귀퉁이에는 부부화합에 좋다며 은행잎 한 쌍씩을 풀로 갖다 붙이니 운치가 더 했다. 문종이 바르기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아 경험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문틈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을 막기 위해 문풍지를 반 뼘 정도 넉넉하게 남게 잘라 여유를 주었다.  <다음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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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2/04 [13:07]  최종편집: ⓒ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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