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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인간문화재 ‘온달 김준호’와 ‘평강 손심심’의 재피방(이야기방) (3)
대포댁의 레시피 ‘젓갈’
 
UWNEWS 기사입력  2020/06/26 [16:33]

 

김준호는 18세에 춘당 김수악 명인을 은사로 소리와 악을 배웠으며, 상징민속학을 전공했다. 해병대 484기이며, 2014년 1월 1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4호 국내 지신밟기 예능 보유자로 선정되어 인간문화재가 됐다. 

손심심은 17세에 문장원, 양극수, 김동원 명무를 은사로 동래양반춤, 동래할미춤, 동래학춤을 시작하였고, 전통무용을 전공했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동래야류 전수조교이고 동래학춤 이수자이다. <편집자주>

 

인간은 엄마의 뱃속에 잉태하자 마자 소금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다. 

 

아기가 자라는 자궁 속의 양수는 바닷물의 성분과 거의 같아 양수의 소금성분이 없으면 아기가 안전하게 자랄 수 없다.

 

인체에서 사람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며 신체의 노폐물을 새로운 물질로 전환시키고 체액의 삼투압을 조절하여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해주는 심장이 바로 소금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심장을 다른 말로 소금통 이라는 뜻으로 염통(鹽桶)이라고 하였다.

 

육식성의 서양이나, 곡식성의 동양이나 인류의 역사는 소금의 역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소금은 오늘날의 석유와 같이 식량과 물과 함께 국가의 기초 자원의 근간이었다. 그래서 소금으로 인해 국가가 번영하기도 하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소금을 통한 막대한 자금으로 정권과 권력을 탈취하기도 하고, 소금에 대한 과도한 과세로 나라가 망하기도 했다.

 

 

당나라 말기에 귀족과 관료들의 횡포에 못 이겨 황소는 왕선지 등과 결탁하여 ‘황소의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특히 농민, 유민, 서민들의 지지를 받아 양쯔강 강남 일대와 수도 장안을 점령하여 당나라가 무너지게 하였다. 

 

그렇게 민심을 얻은 까닭은 황소를 비롯한 난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백성들에게 소금을 싸게 보급해주던 소금장수였기 때문이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5세기경 유목민 훈족의 침공으로 생겨난 피난 도시이다. 당시 훈족은 유목민의 강력한 기동력으로 식량이 모자라면 유럽 일대를 약탈하고 정복했다. 

 

당시 베네토 지방 사람들은 훈족의 공격이 너무 무서워 갈대와 갯벌로 이루어진 석호지대의 섬들로 도망가 사는 것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다. 

 

왜냐하면 훈족은 초원의 병정들이라 바다에 대해 문외한들이라 섬은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물 위에 건설된 피난 도시 베네치아는 7세기부터 해수면이 내려가 천일염의 최적의 생산지가 되었다. 

 

그때부터 소금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가 천일염을 팔아 동방의 물품들과 교역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베니스의 상인이 되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처가도 소금장수였다. 태봉의 궁예와 후백제의 견훤이 서로 대립하고 있을 때, 태봉의 왕건은 후백제의 코앞이라 할 수 있는 나주지역을 취했다. 그 엄청난 전과로 왕건은 백성들과 신료들의 인심을 얻었고, 나주의 호족 오씨의 딸 버들아씨와 혼인을 했다. 

 

이 황후가 태조 왕건의 두 번째 부인 장화왕후로 그 아들이 2대 왕 혜종이었다. 이 당시 왕건이 왕이 되도록 후원해 주었던 장화황후의 집안이 서남해 지역의 제일 큰 염전의 주인으로 소금 무역상이었다.

 

세계의 곳곳에 사람이 살고 가축이 사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소금이 유통되는 소금길이 존재했다. 염분이 결핍되면 사람이건 가축이건 무력감, 피로감, 정서불안, 식욕감퇴에 시달린다. 

 

특히 고도가 높고, 추운 지역일수록 체력의 소모가 많아 필요 소금량은 평지의 두 배에 달했다. 그래서 바다를 접하지 않거나 암염이 생산되지 않는 내륙 산악 지방일수록 소금은 거리에 비례해서 가격이 비싸졌기에 차마고도같이 오지 지역에서는 지금도 차와 소금을 금같이 귀하게 생각하고 있다.

 

▲     ©UWNEWS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동고서저의 산악지형이지만 바다로 둘러싸여 암염보다는 대체로 바닷물을 솥에 끓여 만드는 전통방식인 자염을 많이 생산했다. 질 좋은 개펄에서 생산한 자염은 불순물이 적고 풍미는 좋았지만 운송이 문제여서 더더욱 소금이 귀한 존재였다. 산골 구석구석까지 이 땅의 소금 유통을 한꺼번에 해결한 것이 바로 지게나 나귀로 소금을 운송하는 ‘소금장수’였다.

 

설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금장수들은 젊고 힘이 좋고 효성이 지극하고 자립심이 강한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곳곳을 떠도는 사람들이라 여인들과의 정분은 단골 소재이고 ‘호랑이를 만나 신비한 명의가 된 소금장수’, ‘말이 된 소금장수’, ‘인어의 목숨을 구해 부자가 된 소금장수’, ‘여우잡은 소금장수’, ‘귀신과 싸워 이긴 소금장수’ 설화 등 각종 전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예부터 소금은 삿된 것을 쳐내고 좋은 기운을 불러오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든 것이 이러한 전설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또 이들은 세상 이치에 밝고 문물에 훤하며 눈치와 셈이 빨라, 고구려 시절 ‘을불’이라는 소금장수는 각지의 정보를 잘 활용하여 15대 미천왕으로 등극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 고구려가 중원으로 성장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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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26 [16:33]  최종편집: ⓒ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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