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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인간문화재 ‘온달 김준호’와 ‘평강 손심심’의 재피방(이야기방) (2)
대포댁의 레시피 ‘쥐포무침’
 
UWNEWS 기사입력  2020/06/26 [16:27]

총대나 꽈리고추를 섞어 고추장, 간장, 설탕, 참기름이면 끝

 

 

김준호는 18세에 춘당 김수악 명인을 은사로 소리와 악을 배웠으며, 상징민속학을 전공했다. 해병대 484기이며, 2014년 1월 1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4호 국내 지신밟기 예능 보유자로 선정되어 인간문화재가 됐다. 

손심심은 17세에 문장원, 양극수, 김동원 명무를 은사로 동래양반춤, 동래할미춤, 동래학춤을 시작하였고, 전통무용을 전공했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동래야류 전수조교이고 동래학춤 이수자이다. <편집자주>

 

<지난호에 이어서> 따뜻한 물을 좋아해서 구로시오 난류의 영향을 많이 받는 30∼50m 내외의 남해안의 맑은 물에 주로 서식을 하는데 삼천포 인근 수역이 서식에 천혜의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쥐치는 일단 껍질을 벗기고 뼈와 가시를 발라내면 씹는 식감이 쫀득하고 담백하고 고소해서 횟감, 찌개, 매운탕용으로도 많이 쓰였다. 하지만 쥐치의 진미는 우리가 즐겨 먹는 간식이며, 술안주, 반찬으로 자리 잡은 쥐포에 있었다. 

 

쥐포는 쥐치의 양쪽 살을 발라 조미를 하여 여러 겹을 붙여 건조 시킨 것을 말하는데 원래는 ‘쥐치포’나 그냥 ‘쥐포’로 통용되었다. 사실 쥐치는 삼천포 인근에서 낚시로도 잡을 수 있는 평범한 고기였다. 그러나 질긴 껍질을 벗겨 내야 하는 불편함과 등과 배에 가시가 날카로워 원래는 어부들도 재주 없다고 쫓아버리는 어종이었다. 

 

60년대 삼천포의 한 가공공장에서 새우, 학꽁치, 메기 등을 꼬리만 남긴 상태로 조미 건조한 일본의 화어 어포를 만드는 가공 기술을 적용해서 쥐포를 건조해서 일본에 수출한 것을 계기로 삼천포식의 두껍고 식감이 풍부한 달콤 짭졸한 쥐포가 탄생했다.

 

70~80년대만 하더라도 삼천포 근해에는 쥐치 어획량이 많았고, 삼천포 사천의 곳곳에 쥐포 가공공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쥐포는 저렴한 가격과 때마침 보급된 연탄 화로의 등장으로 간식, 반찬, 선물로 삽시간에 전국을 점령했다.

 

쥐포는 한때 가공된 쥐포를 수출하기까지 할 정도로 삼천포 경제의 70%를 담당하며 전국을 대표하는 호황을 누렸다. 당시 우리 학생들은 소를 팔아서 공부하는 가난한 시골 학생들의 우골탑에 빗대어 우리의 학비를 '쥐포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월사금으로 주어지는 삼천포 사천의 모든 종이돈에서는 눅눅한 생선비린내가 풍겼다.

 

동네 아낙들은 갑자기 들어선 쥐고기 공장에 전부 취직을 했고, 어머니도 그 일을 하셨다. 농한기에는 온종일 공장에서 일했고, 농번기에는 낮에는 농사일하고 밤에 공장을 다니셨는데, 어머니는 매일 잠이 모자라서 코피를 쏟았다.

 

쥐고기 공장은 온통 질퍽한 비린내투성이였다. 연방 바다에서 건진 쥐치가 차에서 내려지고 아낙들 수 십 명은 상자째로 쥐치를 가져가서 쪼그리고 앉아 빠른 손놀림으로 칼로 일일이 껍질을 벗기고 포를 떴다. 임금은 주로 몇 상자를 가지고 가공을 하느냐로 정해졌는데, 어머니는 갯가 대포 출신답게 남들보다 두 배로 손이 빨라 부러움을 샀다.

 

쥐고기 공장은 온 동네 사람들의 소득원이었다. 한쪽에는 아낙들의 칼을 숫돌에 갈아주는 할아부지들이 다섯 명이 앉아 종일 칼날을 세우고, 힘이 센 아저씨들은 떠놓은 포를 큰 플라스틱 사각 초록 삽으로 소금과 당원으로 조미를 해서 여럿이 뒤섞었다. 할무니들은 쥐치포를 그물 발에 손바닥만 하게 붙여 늘어 말리는 일을 주로 했다. 

 

쥐고기 공장은 활기가 넘쳤고 정신이 없었다. 쥐치에서 나온 내장과 뼈는 사료공장으로 실려 가고, 건조된 쥐포는 전국으로 일본으로 팔려 나갔다. 한마디로 전부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쥐포의 황금시대였다.

 

어머니는 노래도 잘하고 손이 빨라 작업반장을 도맡았다. 그 덕분에 상품이 안 되는 작은 쥐치나 잡어들을 집으로 많이 가져오셨다. 그래서 그 당시 햇볕이 종일 드는 마당 한쪽 우리 집 빨랫줄에는 말린 생선과 어머니가 집에서 직접 만든 천일염과 설탕에 살짝 조미한 수제 쥐포가 모기장으로 만든 방충 건조대에 항상 널려 있었다.

 

어머니의 바지런함 덕에 우리 집은 가난한 밥상이지만 크지는 않더라도 생선구이와 매운탕과 그리고 부잣집 반찬으로 올라가는 매콤달콤한 쥐포 무침이 반찬으로 올라오는 호사를 누렸다.

 

쥐포 무침은 의외로 간단한 음식이었다. 어머니는 작은 아궁이에 밥을 안치고 난 잔솔 불을 끄집어내고, 석쇠에 꾸덕한 생선 몇 마리를 얹어 구웠다. 생선이 다 익어갈 때쯤 반 건조된 쥐포를 여러 장 올려 살짝 구워냈다.

 

그리고 구워진 쥐포를 잘게 쪼개고 마늘 총대나 꽈리고추를 섞어 넣고 고추장 한 숟갈에, 간장, 설탕, 참기름을 두르고 가볍게 주무르고 깨소금을 치면 끝이었다.

 

우리는 생선구이가 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보리 잡곡밥 한 숟갈을 듬뿍 떠서 서울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만 먹는다는 쥐포 무침을 한 점 얹어 입이 터지라고 먹으면 그 두툼하면서 부드럽게 씹히는 쥐포 살과 매콤달콤 고소한 양념 맛에 세상 부러운 게 없었다.

 

다 큰 어른이 된 지금도 뇌물 값만큼 값이 오른 삼치쥐포를 만나면 소중하게 구워 그냥 고추장에 찍어 밥 한 그릇을 뚝딱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어머니의 서러운 쥐포탑 비린 돈으로 글공부도 하고 노래공부를 해서 그런지 내 글과 내 노래는 항시 바다 비린내가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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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26 [16:27]  최종편집: ⓒ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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