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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양성평등주간 기획특집 - 여성사 이야기(4)
‘몸’으로 풀어보는 여성사 이야기
기사입력: 2019/07/16 [16:3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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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WNEWS

 

매년 7월 1일부터 7일까지는 양성평등주간이다. <양성평등주간>은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하여 규정한 기념 주간으로 1996년부터 시행된 <여성주간>이 2015년 양성평등기본법으로 개정 되면서 <양성평등주간>으로 개칭되어 시행되어지고 있다. 본 지는 2019 양성평등주간을 맞아 <가족제도와 가족문화 변천사>와 <몸으로 풀어본 여성사 이야기>를 2회에 걸쳐 게재한다. 

 

 

5. 변화하는 몸

 

▲ 단원의 미인도. 조선후기 여성들이 선호한 머리 형태는 머리숱이 풍성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머리에 머리카락을 올리는 ‘다리’나 ‘가체’가 유     ©UWNEWS

치장하고 외출하는 몸

 

여성의 치장은 ‘사치’라는 이름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여성들은 “의복을 단정하게 입고...(중략)의복을 차리지 말고 추위에 얼지 아니할 만큼 입으면서..(중략)” 여성으로서 본분에 충실하도록 권장되었다. 여성을 추모하는 글에는 검소한 모습을 추앙하는 기록이 곧잘 등장하였다.

조선시대의 여성은 치장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남보다 외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치장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18세기 후반 여성의 머리치장은 국가의 강력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조선시대 여성 교육서에 빈번하게 나오는 문구로 『여논어』에 나오는 글이다.

“여성은 바깥을 훔쳐보거나 바깥 뜨락을 나다니지 말아야 한다. 나갈 때는 반드시 얼굴을 가리고, 만일 무엇을 살펴봐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모습을 감추어야 한다. 여성은 마땅히 집 안에 있어야 하고 되도록 나다니는 횟수를 줄여야 한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나갔다가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옆으로 비스듬히 돌려야지 정면으로 누구를 봐서는 안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여성은 사회적으로 그어놓은 경계 ‘담’을 넘어 밖으로 나가 활보하였다.

 

 

▲ 구경하는 여성들 『원행을묘정리의궤』     © UWNEWS

 

 

풍속화 속 일하는 여성들

 

조선 후기에 백성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풍속화가 많이 그려졌다. 그 풍속화에는 여성들이 일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전문직업을 가진 여성들도 등장했는데 의술을 배운 의녀, 전문 관리직인 궁녀, 기녀, 상인들이다. 조선시대에는 평민이나 가장 하층인 천민 여성들이 전문직 일을 했다.

 

▲ 김홍도 <빨래터>     ©UWNEWS

 

▲ 신육복 <어물장수>     ©UWNEWS

 

▲ 김홍도 <길쌈>     © UWNEWS

 

▲ 윤두서 <나물캐기>     © UWNEWS

 

▲ 신윤복 <연당여인>     © UWNEWS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여성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여성에게 문장이나 시 짓기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글을 읽고 쓰는 여성들이 점차 늘어났나. 여성들이 쓴 규방가사를 문집으로 내기도 했고 유교경전을 해석해 논문을 쓰기도 했다.

 

 



6. 깨어나는 몸

 

서학과 동학

 

18세기 말, 천주교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종교라기보다는 학문으로 전해졌다. 서양의 과학 기술과 문물, 천주교를 ‘서양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서학(西學)’이라고 했는데 서학은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배우려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천주 앞에서는 양반과 상놈도 없고, 부자와 가난뱅이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모두  평등하다는 말에 점차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은 천주교를 법으로 엄하게 금지시켰다.

 

▲ ◀ 강완숙(1761~1801)     ©UWNEWS

양반 집안의 딸로 태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비상한 재주를 보여 이를 걱정한 부모가 아들있는 홀아비 홍지영(洪芝榮)에게 시집보냈다. 결혼하여 딸을 낳고 가정생활에 충실한 듯했으나, 1786년 이단원(李端源)이 예산에 내려와 천주교를 전하자 이에 입교했다. 

 

1791년 신해박해 당시 투옥되어 고난을 겪었다. 이후 남편과 이혼하고 시어머니·아들·딸과 함께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1795년에는 황사영과 더불어 주문모에게서 세례를 받고 '골롬바'라는 영세명을 얻었다. 주문모는 그녀의 집에 명도회(明道會)를 설립하여 교리교육에 힘쓰는 한편, 그녀를 부녀회장으로 삼아 부인들에 대한 전교를 담당하도록 하여 왕족의 부녀자들을 입교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801년 다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최필공·이단원·정약용·이승훈 등이 체포되었을 때 함께 체포되어 서대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천주교와 함께 동학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동학은 19세기 중엽 교조(敎祖) 최제우가 주장한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 철학 사상.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기반으로, 봉건적 착취와 압박, 외세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는 농민과 수공업자들을 비롯한 백성의 요구를 반영하여 발생했다. 나라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일본 군대를 우리 땅에 불러들였다. 일본은  우리 땅에 들어와서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되었다.

 

동학농민운동에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함께 있었다. 여성들은 싸움터에 나가 농민군의 음식을 장만하고 돌멩이 같은 무기를 마련하는 일을 했다.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을 모르겠는가

 

동학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895년 일본군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고 일본은 사건을 은폐하려 하지만 곧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방의 유학자를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난다.

 

 

“남녀가 유별해도 나라 없이는 아무 소용없다”

 

 

▲ 윤희순. 시아버지, 남편과 더불어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했다. 1935년 아들이 일본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으로 죽자 원통해하다 76세 나이     ©UWNEWS

윤희순(尹熙順)은 1860년 경기도 구리에서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은 친일내각 타도와 일본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1896년 단발령이 발표되자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윤희순은 의병부대가 마을로 들어와 밥을 달라고 요구하면 선생은 기꺼이 가족들이 먹어야 할 쌀과 춘천 숯장수들이 숯을 사기 위해 갖다 놓은 곡식까지 몽땅 털어 저녁밥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또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을 함께 도울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일본이 아무리 강성해도 우리가 힘을 합치면 쉽게 이를 물리칠 수 있다. 여자라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며, 남녀가 유별해도 나라 없이는 아무 소용없다.

 

그러므로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줘야 한다며 만일 금수 같은 일본인들에게 붙잡히면 시중을 어떻게 들 것이냐며 의병을 도와주자는 내용의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에게 의병활동을 촉구했다.  

  

 

 

 

신여성의 출현

 

▲ (좌)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1896∼1948)  (우) 일제 시대에 무용가로 이름을 세계에 알린 최승희(1911~1967)    © UWNEWS

 

▲ 일제시기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사회주의자로 해방 후 북한에서 문화선전상, 법무상 등을 지낸 허정숙(1902~1991)은 동아일보 최초의 여기자였다   ©UWNEWS

 

신여성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쓴것은 아니다.

 

이 말은 영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주장하거나 바지를 입고 다니는 여성들을 ‘뉴 우먼(new women)’했던 것이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1920년대 유행어가 되었다.

 

 

 

나랏빚을 갚읍시다

 

▲   1907년 남일동 폐물폐지 부인회를 설립, 여성최초의 국채보상운동 참여를 이끈 최경주여사와 그의 남편 서병규(대구국채보상회 간부)  © UWNEWS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나라 문이 열리자 일본은 도로 시설을 정리한다, 금융기관을 확장한다 온갖 명분을 내세워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돈을 우리나라로 들여왔다. 그 돈은 고스란히 우리나라의 빚으로 쌓였는데 그때 돈으로 1,300만 원쯤이었다. 이 금액은 한 해 나라의 전체 예산과 맞먹을 만큼 큰 금액이었다.

 

나랏빚을 갚기 위해 전국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다. 여성들은 일상생활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가락지나 비녀 같은 패물을 모으고 반찬이나 밥을 줄여서 그 돈을 모으기도 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단체를 만들고, 돈을 모으고,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양반집 여성부터 기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성들이 참여했다. 

 

여성들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위해 신분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는 우리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람은 남자와 같다... 이렇듯이 국채를 갚고 보면 국권이 회복할 뿐만 아니라 우리 여자의 힘을 세상에 알려 남녀동권을 찾을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1907.4.23>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 투표하는 여성들. 해방 뒤 여성들은 처음으로 투표를 했다.     © UWNEWS


1946년 12월 선거를 했는데 여성들은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선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만 20세가 넘는 세대주’라고 정했기 때문이다. 그때 세대주는 모두 남자였다. 

 

1948년 3월 17일 1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법이 만들어졌다. 이때 여성에게도 만성과 똑같이 참정권을 인정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면서 여성들은 처음으로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누렸으며 국회의원 후보로 나선 여성들도 있었다.

 

국회의원 후보로 나온 여성은 모두 18명이었다. 여성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을 드러내 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단 한사람도 국회의원에 당선되지 못했다.

 

▲ 우리나라 여성 국회의원 수     © UW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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