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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양성평등주간 기획특집 - 여성사 이야기(1)
가족제도와 가족문화 변천사
 
UWNEWS 기사입력  2019/07/10 [15:35]

매년 7월 1일부터 7일까지는 양성평등주간이다. <양성평등주간>은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하여 규정한 기념 주간으로 1996년부터 시행된 <여성주간>이 2015년 양성평등기본법으로 개정 되면서 <양성평등주간>으로 개칭되어 시행되어지고 있다. 본 지는 2019 양성평등주간을 맞아 <가족제도와 가족문화 변천사>와 <몸으로 풀어본 여성사 이야기>를 2회에 걸쳐 게재한다. 

 

 

  

1. 신석기시대까지 원시공동체 사회

 

▲ 신석기시대 생활모습     © UWNEWS

 

원시공동체사회의 특징은 씨족사회로 구성되어 주로 남자는 사냥, 여자는 과일 채집으로 생활을 영위했으며 소득물은 공동 분배했다.

남자가 사냥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모계 중심사회가 형성되었고 이 당시의 출계율은 모계율로써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또한 일처 다부제의 관계로 가족이 구성되어 가정을 지키는 것은 여성으로, 가족의 중심은 여성이었다.

 

 

2. 고대사회

 

▲ 청동기시대의 움집     ©UWNEWS

 

고조선시대 역시 씨족사회였으나 청동기시대의 생산수단 발전으로 사유재산과 계급이 발생하였고, 또한 타 부족과의 전쟁이 불가피 했기에 전쟁에 나가야 하는 남성의 위치가 높아졌다. 

따라서 가족의 중심은 부계중심 사회로 개편이 되는데 특이한 것은 아버지의 성을 따르되 다만 막내가 상속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장남인 아들은 전쟁을 통해 일찍 죽거나, 분가를 통해 따로 가정을 꾸리는 반면에 막내는 늦게까지 부모 곁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3. 삼국시대

 

▲ <수산리고분 벽화> 고구려시대 귀족부인도     © UWNEWS


이시대에는 청동기시대의 부족개념이 가문으로 변화하여 가족단위로 농경생활을 하였다.

씨성의식이 확립되어진 시기로 초기에는 형제상속, 초기이후는 부자상속을 하게되어 부계 중심사회를 이루고 아버지의 성을 따랐다. 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막내가 상속을 받았다.

 

중국 예교의 전래로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확립된시기로 추정되며 우리나라 호적제도가 시행된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진다.

통일신라시대의 호적제도는 당(唐)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의 호(戶)는 9등호제, 인구는 6~7등급으로 구분했다. 부부와 직계자녀를 중심으로 한 가족으로 대식구의 호구가 있으나 대체로는 3~6명으로 구성된 기본 가족으로 처부모와 동거하는 처가살이의 형태도 엿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호적제도인 연호제도는 현실적으로 공동생활을 하는 가족단체를 단위로 연적이 편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호주제를 바탕으로 하는 최근의 호적제와는 달랐다.

삼국시대의 호적은 국민에게 요역을 부과하기 위한 호구조사 정도였다.

 

● 고구려 서옥제

 

혼인하는 풍습은 먼저 언약으로 혼인이 정해지면 신부의 집에서는 본채 뒤에 작은 집을 짓는다. 이를 서옥(사위집)이라 한다. 

 

날이 저물면 사위가 여자의 집 문밖에 와서 제 이름을 말하고 무릎 꿇고 절하면서 그녀와 함께 유숙할 것을 여러번 간청한다. 신부의 부모가 이것을 듣고 서옥에서 동숙하도록 허락한다. 곁에 돈과 비단을 놓고 자녀를 낳아 키운 후에, 부인과 더불어 남자의 집으로 돌아온다. 신부를 데리고 남자 집에 가서 혼례를 올리는 중국문화식과 달리 신랑이 신부집으로 온 후 여자 집에서 혼례를 치루고 얼마 만큼의 기간 동안 여가에 머무르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서옥제의 기록을 볼 때 그 풍습의 연원이 고구려까지 소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서옥제는 가족 경제력의 많고 적음이나 아들의 유무에 관계없이 혼인 초에 사위가 여가에 머무는 보편적인 풍습이므로 솔서제, 예서제와는 구별된다.  

 

솔서제는 아들이 없는 집에서 양자를 두지 않고 사위를 맞이하여 아들 역할을 대신하게 하는 것으로 데릴사위제라고도 한다. 예서제는 민며느리에 대응하는 것인데 빈곤한 집 출신의 어린 사위를 미리 맞이하여 여자 집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보충해주는 제도이다. 그러므로 서옥제에 연유한 혼인풍습을 사위가 여가에 얼마간 머물다 본가에 돌아 간다는 의미에서 서류부가혼이라고 한다. 혼례를 장가든다고 표현한 우리 전통을 보여주는 풍속이다.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안압지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것으로 경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점 모두가 목재로 만들어졌는데 바닥의 진흙 속에 묻혀져 있어 잘 보존된 것으로 보여진다. 

 

1974년 발굴이후 지금까지도 이 남근은 그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아 설만 무성하다. 누구 손에 만들어졌고 누구의 것이 모델이었는지, 또한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고. 다만 용도에 대해서만 몇몇 설만 무성한 편이다. 

 

신앙으로서의 성기숭배 사상적인 견해와 실제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놀이 기구용’이라는 설이 있다. 불교를 받아들인 법흥왕 전후로 나타나는 토우의형태로 미루어도 불교 도입전 신라는 성문화 개방적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4. 고려시대

 

▲ 고려여인 <고려관료 박익의 벽화묘>     © UWNEWS

 

고려 시대에는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다. 고려시대의 호적제도는 신분제를 바탕으로 계급에 따라 그 내용과 목적이 달랐다. 상인의 호적은 징병·부역에 참고하기 위하여 편성하였으며 양반의 경우 봉건적 신분을 확정, 명시하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호적의 맨 첫머리에는 호주로 보이는 자(者)의 신분, 연령, 본관 등이 기재되어 있고, 대체로 남자가 호주가 되는 경우가 많지만 여자도 호주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자녀의 남녀 구별이나 기혼, 미혼의 차별은 거의 없고 연령의 구별 의식은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가족에서도 가부장제 가족의 형태가 일반화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재산상속에 있어서도 자(子)와 여(女) 또는 친족과 외손 간에 차별이 거의 없는 시대이며, 근친혼 및 동성혼도 널리 행해졌었으며, 고구려와 같이 남자가 처가로 장가들어 아들이나 손자가 태어나서 장성할 때까지 생활하기도 하였다.

 

농경에 기반한 대가족제도였으며 이때까지는 여성에게도 상속권이 있었다. 호적상 동거하는 가구의 구성원 중 근친의 종류와 범위에서 부계친의 경우보다 처계 또는 모계친이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가구구성에서 아버지의 사망 후 형제들이 분가하여 별개호적을 갖는 별적이재의 분가제도가 있었다.

 

결혼은 ‘일부일처제’였는가 아니면 ‘일부다처제’였는가에 대해서는 현재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있으나 왕실은 일부다처체를 향하고 일부일처제 가 일반적 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혼인관계에서는 여성이 예속적이라기 보다는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며 여성의 재혼이 자유로웠다. 남편사망 후 호적상 호주의 지위를 차지하며, 성장한 아들이 있는 경우도 어머니로서 호주가 되었다.

 

● 이승장의 묘지명

 

▲ 고려중기 문신 이승장(1137∼1191)의 묘지명  ©UWNEWS

“의붓아버지가 가난을 이유로 따로 공부시키지 않고 자기 친아들과 동업하게 하자, (이승장의) 어머니는 그럴 수 없다 고집하며 이렇게 말했다.

‘먹고 살기 위해 부끄럽게도 전 남편과의 의리를 저버렸으나 유복자(이승장)가 다행히 잘 자라 학문에 뜻을 둘 나이가 되었으니 그  친아버지가 (생전에)다니던 사립학교에 입학시켜 뒤를 잇게 해야 해요. 아니 그러면 죽은 뒤에 제가 무슨 낯으로 전 남편을 보겠어요?’  마침내 (새 남편이) 결단해 (이승장을) 솔성재(率性齋)에서 공부하게 하니 전 남편의 옛 학업을 뒤따르게 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남편을 여읜 여성의 재혼에 대해 사회적 인식이 그리 부정적이지 않았고 재혼 후의 생활에서도 여성들은 새 남편을 상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음을 보여준다.

 

 

5. 조선시대


조선시대 이후 성리학이 보급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약화되고 이에 따라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게 되는데, 이는 여성은 ‘출가외인’이며 출가 후에는 친정에 대한 권리가 사멸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부분 인구의 증가와 생산물(토지, 재물)의 한계로 인한 것도 영향이 있었는데 여성의 상속권이 다시 인정된 것은 근대 이후부터 인정되기 시작한다.

 

조선은 고려의 호적제도를 승계하고 수정 보완하였는데 그것의 목적 역시 요역을 부과하고 신분을 확인·명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부장 중심적인 유교의 영향으로 여계친족을 제외하는 등의 차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는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비로서 호적제도가 형식적·체계적으로 정비·확립되었다. 경국대전의 호전편(戶典編)에 3년마다 호적을 개편하여 본도(本道)의 본읍(本邑)에 보관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조 말엽에 이르러 호구조사제도는 가장이 호주라는 법률적 칭호로 표시됨과 아울러 가의 대표자·주재자로서의 명확한 지위가 표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 말에 전래된 주자학의 영향으로 가부장제 가족제도가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승유정책과 함께 종법제적 가족제도가 사회의 보편적 원리로 자리 잡기 시작 하였다. 

 

가부장제 가족원리가 일반 서민층에 확대적용 된 것은 17세기 중엽 이후이다. 16세기 중엽부터 장남우대, 남녀차별 등의 차등분할이 증가하고 17세기 중엽이후에 가서야 적장자 우대의 경향이 지배적으로 되었다. 

 

● 호적대장 작성을 위한 규칙

 

▲ 호적대장 작성을 위한 규칙            ©UWNEWS

조선시대에는 전체인구를 파악하기 위하여 3년마다 작성했다. 호적을 작성할 때에는 집집마다 가족의 명부를 적어 관에 제출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호구단자’라고 한다.

 

정부는 이를 토대로 호적대장을 작성하였으며 이때 호적에 적었던 주요사항은 1)호주의 직업, 성명, 나이, 출생연도, 본관, 4조의 직업과 성명 2) 아내의 성과 신분을 묘사하는 호칭, 나이, 출생연도, 4조의 직업과 성명 3)동거하는 식구의 성명, 직업, 나이, 출생연도 4)노비의 이름, 나이, 출생연도 등이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족보에는 여성의 이름이 있었을까?

 

족보는 특정 성씨의 시조부터 편찬 당대인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기록한 책자로, 족보가 본격적으로 출연한 것은 조선시대였다. 

 

족보에는 시조에서부터 세대 순으로 이름과 자호, 시호, 과거급제 내용과 관직, 저술과 문집, 특기할 만한 업적, 그리고 출생과 사망 연월일, 묘지의 위치 등 개인의 모든 경력과 이력을 기재하였다. 

 

족보는 철저히 남성 중심의 기록물이기 때문에 여성의 이름이 족보에 오를 수는 없었다. 딸은 사위의 이름으로 오르고, 부인의 경우에는 친정의 성과 본과, 부친 및 가문의 이름난 조상이 기록될 뿐이었다. 다만 조선전기 족보는 아들과 그 손자만을 기재한 조선 후기의 족보와 달리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수록하였다. 또 기재 방식도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출생 순서대로 적었다.

 

 

● 조선시대엔 여성의 재산권이 강했다?

 

▲ 조선시대의 기본법전‘경국대전’     ©UWNEWS

(1) 적처 소생일 경우 장자, 차자, 딸의 성별 구별 없이 모두에게 같은 양의 재산을 분배하고 그 가운데 제사를 지내는 자식에 한해서 상속분의 5분의 1을 더해준다. 

(2) 모든 경우(적처와 첩 모두), 아들 딸 간에는 균등분배를 행한다. 

(3) 부부는 각자가 따로 노비를 소유하여 자기 재산을 가질 수 있고, 자녀가 없는 경우는 부부가 함께 그 자식에게 사간의 상속을 인정하지만 사후에는 각기 본족에 환치한다. 

 

‘경국대전’은 “남녀차별 없이 재산을 균분해서 상속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남녀평등 상속제’가 시행됐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의 강한 재산권을 가능케 한 ‘남녀평등 상속제’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분재기’의 변화 과정을 통해서 밝히고 있다. 

분재기를 보면 항상 제사를 모시는 ‘봉사’에 대해 별도의 재산을 배정해두고 있는데, 17세기 이전에만 해도 딸과 아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셨기 때문에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3대 봉사가 4대 봉사로 증가하면서, 제사의 횟수와 종류가 증가하게 되자 봉사조의 세분 현상이 나타났다. 게다가 장자 중심의 가치관이 강화되면서 결국 제사를 모시는 ‘장자’에게 더 많은 재산을 주게 되었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 호적제도

 

▲ ◀ 일제 강점기때 창씨개명한 사람의 독립 후 조선성명 복원령에 따라 원래 성씨로 바뀐 호적 2부     ©UWNEWS

우리나라 법 규정에서 호주라는 용어는 조선 말엽 서기 1896년 호구조사규칙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법령이 생기게 되었다. 

 

조선의 호적제도는 1909년 3월 일본의 호구실수를 파악하여 시정(施政)상 편의를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민적법(民籍法)과 내무훈(內務訓)인 민적법집행심득(民籍法執行心得)이 제정·공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호적제도는 종래의 호구조사의 수단에서 탈피하여 근대적인 호적제도로의 체계를 갖추었으며 그 명칭도 민적법으로 바뀌었다.

 

1939년 12월 26일 호적의 기재수속에 관한 건 등에 의하여 우리 고유전통문화의 말살과 함께 창씨개명을 단행하였다. 여기서 호주 및 그 가를 칭하는 씨(氏)로서 창씨개명을 하게 하였으며, 조선민사령 제11조의 2를 신설하여 이성양자 및 서양자제도를 도입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기를 거쳐 1958년에 이르러 민법이 제정·공포되었다. 전후 일본은 새 헌법 하에서 호주제를 전면 폐지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법은 일제시대의 호주제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조선의 관습적 가계 계승자와 호주를 혼동하면서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제정 과정에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가족법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많은 여성지도자들과 여성단체들이 노력하였으나 좌절되어 결국 위와 같은 민법이 제정되었다. 이 후에도 계속 논의와 연구가 이루어져 1974년에 호주제 폐지 등의 개정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결국 일부가 개정되었으나 호주제와 동성동본불혼제는 제외되었다. 

 

1990년 비로소 가족법의 일부 개정이 이루어졌지만, 호주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호주와 가족’장은 그대로 존속하고 다만 호주의 권리의무를 대폭 삭제하고 호주권을 축소한 정도였다.

 

 

6. 현대사회

 

● 호주제 폐지

 

호주제는 관리, 공시제도의 한 종류로 한 가족을 단위로 그 가족을 하나의 공적부에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국민을 따로따로 관리, 공시하지 않고 가족 단위로 묶어서 하나의 공적부에 기록한 것이 곧 호적이고, 이 제도가 호주제도이다.

 

호주제는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법률 개정에 따라 2008년부터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호적 대신 가족관계등록부가 사용되며 호주제가 폐지됨에 따라 본적 개념이 사라지고 자녀가 어머니의 성(姓)과 본(本)을 따를 수 있게 된다. 

 

대법원은 호주제 폐지에 따른 호적법의 대체법으로 가족관계등록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표하고 2008년 1월1일부터 시행됐다.

 

 

▲ 호주제 폐지반대 기자회견     © UWNEWS


<역사적 배경>

호주제도는 한국사회의 가부장 의식과 악습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여성차별적 제도라는 비판 끝에 결국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폐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시된 비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주제는 가족 구성원을 호주에게 종속시켜 개인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부정하고 일률적으로 순위를 정함으로써 평등한 가족관계를 해쳤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은 혼인 전에는 아버지가 호주인 호적에, 결혼하면 남편이 호주인 호적에, 남편이 사망하면 아들이 호주인 호적에 올라야 하는 예속적인 존재로 규정되었다.

 

또한 호주승계 순위를 아들→딸(미혼)→처→어머니→며느리 순으로 정해 놓아 아들 선호를 조장했다는 것으로, 아들을 1순위로 하는 호주승계제도는 아들이 딸보다 더 중요하다는 법 감정이 내재된 것으로써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한다는 남아선호사상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부가(父家) 입적과 부성(父性) 강제 계승을 통한 가족제도 유지는 다양해지는 가족형태를 반영하지 못해 한 부모 가족, 재혼 가족을 비정상적인 가족으로 만들었다.

 

이상의 문제점들에 근거하여 호주제도의 위헌적·반인권적 성격, 민주적 기본질서 위반, 제도와 현실의 부조화, 그리고 한국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제도의 후진성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지속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폐지되었다.

 

 

▲ 2000년대 대학로에서 열린 3ㆍ8여성대회 가두행진 모습     © UWNEWS

 

<경과>

ㆍ1999년 5월여성단체연합 호주제폐지운동본부의 발족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같은 해 11월 5일에는 유엔 인권이사회의 호주제 폐지 권고 결의도 발표되었다. 

ㆍ2000년 9월 22일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가 발족하여, 호주제 폐지 국회 청원이 시작되었다. 

ㆍ2003년 1월 9일 여성부는 호주제 폐지 및 ‘가족별 호적편제’ 도입 방안을 추진하였고, 같은 해 2월 16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호주제 폐지를 ‘12대 국정과제’로 선정하였다. 

ㆍ2003년 9월 4일 법무부는 호주제 폐지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였고, 같은 해 11월 20일 헌법재판소의 호주제 첫 공개변론이 시작되었다. 헌법재판소는 5차에 걸친 공개변론 끝에, 2월 3일 최종적으로 호주제 규정 민법 781조 1항 및 778조의 헌법불합치를 결정하였다.

 

 

● 다문화 사회

 

1990년대 이후 꾸준히 국제결혼이 이어지면서 한국 사회는 다문화 가정을 이룬 사회로 접어들었다. 

 

주로 아시아 여성들이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여 한국사회에 편입되는 형태로 다문화 가정이 형성되고 있다. 

 

다문화 가정은 국가, 성, 계급 등의 결합을 포함하는 개념이므로, 다문화 가정에 대해 알아보려면 언어 및 문화 적응을 포함한 결혼 이주 여성의 한국 사회 적응, 다문화 가정 내 부부 관계 및 부모자녀 관계의 형성, 다문화 가정의 사회 내 적응 등의 문제를 중요하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199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화에 따라 인구의 국가 간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는 주로 혼인 적령기를 놓친 농촌 지역의 미혼 남성 위주로 국제결혼이 이뤄지고 있다.

(이현주, 2013 한부모 이주여성의 자녀양육과 삶에 대한 연구. 여성학연구) 

 

우리나라 여성 결혼 이민자의 증가는 세 단계를 거쳐 확산되었다. 1990년대 초 중국과 수교 이후 조선족 여성들이 대거 유입한 것이 첫 단계이며, 일본과 필리핀, 한족 등 특정 종교의 신도로, 또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아 한국 남성과 결혼한 것이 두 번째 단계이며, 2000년 이후 필리핀, 베트남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 여성들이 사설 결혼 중개업체를 통해 대거 입국하고 있는 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설동훈, 한건수, 2005 국제결혼 이주 여성 실태조사 및 보건복지 지원정책방안. 보건복지부 연구보고서)

 

 

●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나라는?

 

2001년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스페인, 노르웨이, 스웨덴, 프랑스, 캐나다, 아이슬란드 등이 의회 입법이나 법원 판결 등을 통해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바 있다. 

세계 최초로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한 국가는 2001년 네덜란드며, 이후 2003년 벨기에가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허용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2005년에는 캐나다와 스페인, 2009년에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2010년에는 포르투갈, 아이슬란드, 아르헨티나, 2014년에는 영국이 동성커플의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였다. 

2015년에는 아일랜드와 미국이 동성결혼을 합법화시키면서 2015년 7월 기준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국가는 21개국에 이른다.

 

동성끼리 함께 살 수 있는 제도를 처음 마련한 나라는 덴마크로, 덴마크는 1989년 동반자 등록제를 만들어 동거하는 동성 커플을 가족의 형태로 인정했다.

2001년 네덜란드가 세계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이후 벨기에(2003), 캐나다, 스페인(2005) 등에서 동성결혼이 허용됐고 2006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 최초로 동성결혼을 허용했다. 

2015년 4월에는 아일랜드가 국민투표에 따라 동성결혼을 합법화시켰다. 

2015년 6월에는 미국이 동성 결혼을 합법으로 선포함에 따라 2015년 7월 기준 전 세계에서 동성 결혼을 합법화한 국가는 21개국이고, 커플 등록 등 제도적으로 동성 간 혼인을 허용하는 국가를 포함하면 35개국에 이른다.

 

우라나라의 경우 김조광수·김승환 커플이 2013년 9월 결혼식을 올렸으며, 당해 12월 서대문구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했으나 구청은 동성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현행 법체계를 근거로 불수리를 통지했다. 

이에 이들은 2014년 5월 법원에 불복신청을 냈으나 2016년 서울서부지법은“결혼은‘남녀 간 결합이며 동성 간 결합 혼인으로 허용할 수 없다”고 판단해 각하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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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7/10 [15:35]  최종편집: ⓒ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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