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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3.1 독립만세운동 100주년, 다시 생각하는 대한민국 3
울산병영 만세운동과 외솔 최현배
기사입력: 2019/02/13 [10:34]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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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모근 기자

상남면 길천리 빈 집에 모여 태극기 제작

 

▲   병영 만세운동 재현행사  © UWNEWS

 

[울산여성신문 문모근 기자] 1919년 4월, 온나라가 3.1만세운동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외솔이 태어난 경남 울산군 하상면 ‘병영마을’도 만세의 기운이 번져나갔으니 4월 4일 병영마을 청년회 간부들이 앞장서 병영 일신학교(지금의 병영초등학교)에서 만세시위를 벌렸다.

 

마을청년회 회원들과 일신학교 학생들은 축구경기를 핑계 삼아 일신학교 운동장으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공을 차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청년들은 큰길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총칼을 앞세운 일제경찰에 거의 모든 청년들이 붙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날(4월5일) 최현배의 동생 최현구와 윤학이, 황정달, 문성초, 백봉근 등 마을 청년들은 전날보다 더 세차게 만세를 부르며 경찰주재소까지 몰려가 붙잡아간 청년들을 풀어달라고 소리쳤다. 

 

이 과정에서 김응룡, 주사문, 엄준, 문성초 네 사람이 일제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죽고 다른 네 사람들도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 (좌측부터) 외솔 최현배(1984~1970), 병영청년회 창립 1주년 기념사진     © UWNEWS



이틀간에 걸친 만세운동으로 17명이 붙잡혔고 최현구 1년6개월, 최현배의 4촌동생 최현표 6개월 등 모두 6개월에서 2년 사이의 옥살이를 겪었다. 최현구는 고된 옥살이에도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만주로 가서 계속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결국은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만다.

 

현재 울산병영초등학교 뒤편에는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가 희생된 넋을 기리고자 ‘삼일사(三一祠)’라는 사당과 함께 마당에 충혼비를 세웠다. 충혼비 뒷면에 새겨진 ‘삼일사 노래’는 외솔이 지었다.

 

▲ 언양 만세운동 재현행사ㅣ     © UWNEWS



언양장터 3·1운동 이은 4·2 만세시위 펼쳐

 

1919년 3월 하순 울산군 상남면에서는 천도교 계통의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그 중심인물은 상남면 길천리에 사는 이무종(李武鐘)·이규인(李圭寅)·이성영(李成榮)·강경찬(姜庚贊)·최해선(崔海璇)·이규경(李圭庚) 등 6명이었다. 

 

이들은 만세시위 일자를 4월 2일 언양 장날로 정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밤 상남면 길천리 이규인 소유의 빈 집에 모여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시위를 준비하였다.

 

다음날 4월 2일 이들 6명은 밤새 제작한 태극기를 비밀히 간직하고 이른 아침 언양장터로 잠입하였다. 장터에는 울산군의 상남·중남·삼동·두동·두서의 각면과 양산군 하북면으로부터 700~800여 명의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준 후 읍내시장 복판인 남부리 도로상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경찰은 시위 주도자 몇 명을 언양경찰관주재소로 연행하였다. 그러자 시위대는 만세를 외치면서 주재소로 쇄도해 들어갔다. 일본 군경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군중들은 일제히 이들에게 투석으로 맞섰다. 

군중들이 달려들어 순사의 총기를 탈취하려는 육박전을 벌이자 일본군 수비병은 시위 군중들에게 무자비한 총탄 세례를 가하여 시위군중 1명이 즉사하고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시위군중들이 흩어지자 일본 군경은 주요 인물 검거에 나섰다. 

 

이리하여 48명의 인사들이 검거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시위 주도자 대부분 징역 1년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와 대구형무소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 외에도 울산 만세운동은 4월8일 남창만세운동으로 이어진다. <다음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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