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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3.1 독립만세운동 100주년, 다시 생각하는 대한민국 2
한용운 등 33인 인사동 음식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문모근 기자 기사입력  2019/01/30 [17:18]

 

[울산여성신문 문모근 기자] 이들은 고종의 국장일인 3월 3일을 앞두고 지방에서 많은 민중들이 상경할 것으로 보고, 일요일인 2일을 피해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고,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선언서를 인쇄해 전국 각지에 전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의 책임 아래 2월 27일쯤 독립선언서 2만 1,000여 매가 완성됐다. 이를 전후해 선언서에 서명 날인할 민족대표 33명을 종단별로 나누어 확정했다. 

 

천도교에서는 15명, 기독교에서는 16명, 불교계에서는 2명이 이름을 올렸다. 독립선언식 장소는 당초 탑골공원으로 정했으나, 폭력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인사동 음식점인 태화관(泰和館)으로 급히 변경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는 33명의 대표 가운데 지방에 있던 4명을 빼고 29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불교계 대표인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했다. 이들은 태화관 주인에게 조선총독부에 신고하도록 했고, 10여 분 만에 태화관을 급습한 일본 경찰 80여 명에게 모두 연행됐다.

 

▲ 삼일독립선언유적지(태화관 터)     © UWNEWS

 

한용운 등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경찰에 모두 연행

 

장소가 바뀐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학생들은 2시 30분쯤 시민 약 5,000명과 함께 탑골공원에서 독자적으로 선언식을 가졌다. 이들은 팔각정(八角亭) 단상에 태극기를 내걸고 행사를 마친 뒤 동서 시가지로 나누어 행진하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위대는 덕수궁에 마련된 고종의 영전에 조례(弔禮)를 올리기도 하고, 프랑스 영사관에 가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본국에 알리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에 적시된 대로 ‘질서를 존중하고 공명정대하게’ 주장을 펼쳤다.

 

같은 시각에 서울 북쪽 지역인 평양과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도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까지 확산됐다. 

 

전국적인 시위는 5월 말까지 이어졌고, 3월 20일쯤부터 20일 남짓 동안 그 절정을 이루었다. 시위는 철도 주변의 대도시에서 중소 도시와 읍면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 양상을 보였으며, 각 지역에서 구호가 적힌 전단이나 격문 등이 유포되고 일본 관리와 친일 인사 등에게 협박편지가 발송되기도 했다. 5월 말까지 통틀어 전국 218개 군에서 200만여 명의 주민이 1,500여 회의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 기미독립선언서(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 UWNEWS


평양과 원산, 연해주, 미주 등지의 한인에게 확산

 

만세 시위는 만주나 연해주, 미주 등지의 한인에게도 확산됐다. 만주 서간도에서는 3월 12일 수백 명의 한인이 독립 축하회를 개최하며 시위했고, 다음 날에는 북간도에서 1만여 명의 한인이 모였다. 

 

훈춘에서는 20일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상가를 철시한 가운데 행사가 진행됐다. 노령 연해주에서는 17일 블라디보스토크 일대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 일본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당국이 시위를 중지시키고 일부 주동자를 검거하는 바람에 동맹 휴업, 휴학이 벌어졌다. 

 

시위는 같은 날 우수리스크를 비롯해 노령 각지에서 잇따라 열렸다. 미주 지역에서는 1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독립을 다짐하는 12개 항의 결의안이 채택되고 포고문이 발표됐다.

 

거족적인 만세운동에 놀란 일제는 군대와 헌병, 경찰을 총동원해 무력 진압에 나섰다. 당시 한국에 주둔한 정규군 2개 사단 2만 3,000여 명에 더하여 4월에는 일본에서 헌병과 보병부대가 증파됐다.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 하며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고, 4월 들어서는 경고 없이 실탄 사격을 하도록 지침을 시달했다. 이로 인해 전국에서 살육과 고문, 방화 등 야만적인 탄압이 이뤄졌다.

 

▲ 천안 아우내 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 UWNEWS


일제 군대와 헌병, 경찰동원 집압나서, 실탄사격도 불사

 

3월 10일에는 평남 맹산읍 시위 군중 50여 명을 죽이고, 4월 15일에는 수원 제암리에서 마을 주민 30여 명을 교회에 가둔 채 불을 질러 타 죽게 했다. 화성군 송산면에서는 마을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천안 아우내(竝川, 병천)에서는 유관순(柳寬順)이 장터에서 태극기를 나눠 주다 체포돼 악랄한 고문 끝에 옥사했다. 5월 말까지 한국인은 7,500명이 피살되고, 4만 6,000명이 체포됐으며, 1만 6,0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또 교회 47곳과 학교 2곳, 민가 715호가 불탔다. 당초 비폭력, 무저항을 표방한 만세 시위는 3월 말 이후 점차 폭력화 양상을 띠면서, 전차 공격, 헌병 주재소 습격, 관공서 방화 등이 일어났다. 일제 강점기 동안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던 3·1운동은 종교계와 학생, 지식인은 물론 노동자와 농민, 중소상공인 등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의 참여 주체를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도 3·1운동의 결실에 따른 것이었다. 또 일제는 3·1운동을 기점으로 한국인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 통치로 접어들게 된다. 무단 통치는 붕괴됐지만, 기만적인 문화 통치에 의한 일제의 탄압은 여전했다. 

 

세계적으로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무저항운동,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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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30 [17:18]  최종편집: ⓒ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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