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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편의 작품 종횡무진한, 뼛속까지 영화인 함철훈 감독
울산여성신문이 만나는 영화인
 
이민정 대경대 교수/PD 기사입력  2019/01/18 [10:00]
▲ 함철훈 감독     © UWNEWS

 

[울산여성신문 이민정 편집부국장(대경대 교수/PD)] 현업으로 활동하고 있는 영화인들의 수는 2016년 현재 2만5천 명 정도이니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0.5%정도밖에 안 된다. 작품을 함께 하지 않았더라도 이름 정도는 알고 있거나 누가 어땠다더라 하는 몇 가지 에피소드는 공유하고 있다. 그만큼 영화‘판’은 외진 산골마을만큼이나 좁다. 그렇다 보니 부끄러운 자들은 퇴출되거나 영화인이란 허울을 뒤집어쓰고 영화‘판’ 바깥에서 기웃거리기만 하는 반면, 능력 있고 좋은 사람은 뉴스에 드러나진 않을지라도 필요한 자리의 상위권 순위에 빠짐없이 언급된다. 

 

함철훈 감독이 그런 사람이다. 낯선 영화인들이 대화를 이어 나가며 공통주제를 찾을 때 언급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 함감독이고, 촬영현장에 SOS로 가장 많은 호출을 받는 자 중의 하나도 그이다.

 

1963년생인 그는 토끼처럼 순한 외모와 겸손한 성품, 현장에서의 뛰어난 문제해결능력 등으로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영화인이다. 하지만, 함감독은 알면 알수록 영화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강렬한 고집불통이고, 단 한 음절의 고성 없이도 반대에 부닥친 스태프들을 설득해내는 강인한 뚝심을 가진 영화인이다. 거의 매일 상업영화, 독립영화, 단편영화, TV드라마, CF, 뮤직비디오 등 카메라가 필요한 자리에 늘 나가 있는 함감독을 어렵게 인터뷰했다.

 

함철훈 감독

연 출 <류>(2019, 프리프러덕션 중), <레퀴엠>(2015), <우물>(2004), <고양이눈>(2000), <아킬레스건>(1997) 외 다수

촬 영 <시선>(2018, 박승권), <이무회우>(2017, 이진아), <야누스>(2015, 손영국) 외 다수

무 술 <구타유발자>(2006, 원신연), <달콤살벌한연인>(2006, 손재곤), <중독>(2002, 박영훈) 외 다수

녹 음 <모노크롬1953>(2018, 김문옥), <개같은것들>(2017, 최종학), <오마이갓>(2014, 채널A) 외 다수

편 집 <라스트맞짱>(2016, 손몽복), <무신>(2012, MBC, 액션부문>, <한성별곡>(2007, KBS2, 액션부문) 외 다수

수  상 2006 뉴욕국제독립영화제 액션영화상<마지막이브>(무술), 2006 미국 B-MFF 촬영상<마지막이브>(촬영), 2006 미국 File Threat 베스트10 선정<마지막이브>, 충주영화제 최우수작품상<격투>(제작, 연출, 촬영, 편집)

 

 

이민정 2000년 박영훈 감독님이 <정인> 준비할 때 뵈었으니 감독님 안 지도 올해 햇수로 20년이 되네요. 제 작품 준비할 때도 많이 도와주셨고, 독립영화나 홍보영상 찍을 때도 거의 감독님과 함께 작업했던 것 같습니다. 올해 제 영화도 같이 가셔야죠.

 

함철훈 이감독이 날 좀 많이 괴롭혔죠. 나도 체력이 좋은 편인데, 30시간 넘는 촬영이 이어질 때 끄덕 없는 이감독도 참 대단했습니다. 편집할 때 한두 프레임 단위로 지나치게 꼼꼼한 것도 내가 말은 안 했지만……. (웃음)

 

이민정 작년 11월에 강원도 양양으로 이현승 감독님 현장에 지원 갔다가 송윤상 수중촬영감독, 김현기 촬영감독과의 대화중에 감독님 얘기가 나왔어요. 영화판이 아무리 좁다고는 해도 신기하더라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김감독은 감독님을 녹음기사로, 송감독은 촬영감독으로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함감독님은 각본, 연출, 촬영, 조명, 녹음, 편집, CG, 거기에다 모든 파트의 웬만한 장비까지 다 갖추고 있는 독불장군 영화인이다……. (웃음)

 

함철훈 내가 필요해서 그냥 다 배우고 다 갖춘 거죠.

 

이민정 제가 아는 것만도 감독님 참여 작품이 장르 불문, 매체 불문, 최소한 200편은 넘는데, 영화판에 들어오게 된 계기와 당시 에피소드 몇 가지만 말씀해 주세요.

 

함철훈 고등학교 때 이소룡과 성룡의 액션에 흠뻑 빠져서 운동을 시작했죠. 올해로 영화에 입문한 지 36년째인데, 1992년 여대위 감독의 <가자왕>에서 주연을 맡았던 원진 선배의 권유로 1983년 대만합작 무협영화배우로 데뷔를 했고, <중독>, <댄서의 순정>,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연출한 박영훈 감독과 함께 출연했어요. 박감독은 이소룡 파, 난 성룡 파였죠.

 

이민정 저도 고등학교 때 이소룡의 영춘권법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낙법만 배우다가 끝났지만. (웃음) 박감독님이 실제로 이소룡과 많이 닮으셨어요.

 

함철훈 (웃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주인공 칼에 맞아 죽는 것도 영광이었던 나와는 달리 박감독은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고 혹사시키는 선배들에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당시 두 달 동안 두 편의 합작영화를 끝내고 받은 수당이 마지막 날의 회식과 차비 조로 준 5천원이 전부였으니까요. 박감독은 대학에서 영화 연출 쪽으로 노선을 바꿨고 난 스턴트맨으로 계속 가다가, 고 김종학 감독의 <여명의 눈동자> 현장에서 FD와 스턴트맨으로 박감독을 다시 만났습니다. <49일의 남자>에서는 조연출과 스턴트코디네이터로 만났고요. 그때 정보석 씨 대역을 한 후배가 <구타유발자>, <가발>, <용의자> 등을 연출한 원신연 감독입니다.

 

이민정 당시 준비하던 작품 때문에 강원도에서 촬영 중이던 원감독님의 <구타유발자> 액션 신을 유심히 관찰하던 때가 기억나네요. 롱패딩을 입고도 제법 추웠어요. 서정수 씨였던가요? 스턴트맨으로서 위험과 부상으로 힘들어 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감독님도 스턴트맨으로 활동하면서 위험했던 때가 많았을 것 같아요.

 

함철훈 <조선왕조오백년>(1983~1990, MBC) 촬영 땐데, 특수효과 팀에서 몹신(Mob Scene) 폭발 장면에 진짜 TNT를 썼어요. 이놈이 터질 때는 무조건 하늘을 보고 죽어야 돼요. 폭탄이 터진 뒤 30초쯤 지나면 집채만 한부유물들이 쏟아지는 걸 보고 피해야 하니까. 정말이지, 사람만 한 바위가 공중에 떴다가 떨어집니다. 죽을 때도 잘 죽어야 해요. 죽어 있다가 배우가 던진 총에 눈이 찔려 실명한 후배도 있거든요.

 

한 번은 제작비 때문에 스턴트맨을 많이 쓸 수가 없어서 스턴트맨 사이사이로 보조출연자들을 배치해서 전쟁신을 찍을 때였어요. 폭탄을 맞고 앞으로 회전하면서 죽어야 하는데, 스턴트맨들은 앵글과 동선을 생각하지만 보조출연자들은 잘 모르거든요. 어떤 분이 제 발을 툭 건드리는 바람에 완전히 회전을 하지 못하고 허리가 꺾이는 부상을 입어 반 년 동안 일어나지도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보험은 고사하고, 다친 게 소문나면 일이 안 들어오니까 컨디션이 안 좋다고만 했었죠. 선배들이 알면서도 모른 척하면서 제가 나을 때까지 기다려줬어요.

 

이민정 전, 말하자면 충무로에서 강남으로의 과도기 세대인데, 감독님은 영화판의 변화를 모두 겪은 세대로서 온도차를 더 크게 느끼실 것 같아요.

 

함철훈 영화판 정말 많이 변했죠. 인력 시스템도 그렇고, 장비 시스템도 그렇고요. 아무래도 우리나라 영화가 초창기에는 일제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 도제식이었어요. 제일 밑바닥부터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야만 감독이나 기사를 할 수 있는 도제 시스템. 그러다가 해외유학을 하거나 대학에서 영화만 집중적으로 배워서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모든 분야가 전문화되어 가는 할리우드 시스템으로 바뀌었어요. 조감독도 전문 조감독, 단편영화 한편으로도 감독 데뷔가 가능해지는 그런 구조죠. 양날의 검처럼 영화판 진입시기나 주도권 취득 시점이 빨라진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노하우의 부재로 문제해결능력이 부족하거나 저급한 실력을 낮은 인건비로 메꾸면서 하향평준화와 함께 빈익빈부익부 구조를 고질화시키는 단점도 있습니다. 장비면에서는 아무래도 아날로그 필름 시스템에서 디지털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죠.

 

이민정 배우가 감독으로 데뷔하는 사례가 최근 늘어나고 있지만, 무술감독이 감독으로 전향하는 것은 아무래도 드물거든요. 게다가 감독님은 장비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계시잖아요.

 

함철훈 1980~90년대에 비디오플레이어 판매를 위해 전자제품 회사가 비디오영화제작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했어요. 다양성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죠. 그때 현장경험이 풍부한 동료들이 중지를 모아 저예산영화제작을 위해 연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멤버들이 원신연 감독과 조병옥 감독(개들의 전쟁, 2012)입니다. 저도 단편, 중편, 장편을 꽤 만들었고, 지금도 <류>라는 작품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독립영화를 하면서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들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많이 갖추게 됐네요. 이젠 남에게 손 벌리지 않아도 되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한두 시간 토론할 수준은 된 것 같습니다.

 

이민정 지면이 넉넉하지 못한 게 정말 아쉽네요.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함철훈 영화인이 되겠다면 꿈꾸고 즐기면서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부담이 된다면 아직 적절한 때가 아니니까요. 그럴 땐 주위의 다른 영화인들을 도와주면서 여유를 가지는 게 좋습니다. 

30대 후반에도, 40대 후반에도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을 다시 할까 합니다. 녹록치 않은 현실과 부딪치면서 진행하다 보니 많이 늦어지기도 해요. 하지만, 이미 많이 늦어진 것, 더 늦어진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누군가가 내게 기회 주기를 바라면서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준비가 되었다면 시작을 하고, 시작했다면 완성될 때까지 꾸준히 나가는 것, 그래서 결국해내는 것, 그것이 영화인으로서 함철훈의 도전입니다.

 

(진행: 이민정/ 사진: 함철훈 감독 제공/ 섭외: 정예지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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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18 [10:00]  최종편집: ⓒ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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