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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 보다 ‘착한 척하는’ 더 나쁜 놈들
울산여성신문이 만난 영화이야기
 
이민정 편집부국장 기사입력  2019/01/07 [14:15]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  <시계태엽 오렌지>, <뻐꾸기둥지 위로 날아간 새> 영화포스터 (사진출처 : 네이버영화)    ©UWNEWS

 

  [울산여성신문 이민정 편집부국장] 2003년 개봉한 <살인의 추억>과 2008년의 <추격자>는 봉준호와 나홍진이라는 대단한 감독들의 출현과 함께 송강호와 김윤석이라는 큰 배우들 간의 기시감으로 충분한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웠던 현상은 연쇄살인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분)와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 분)에게 공감하는 관객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극중 박현규와 지영민이 아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몽타주의 배우 박해일과 남성미 넘치는 배우 하정우에게 의한 것이었지만(물론 이들의 연기는 어떤 역을 맡아도 무조건 훌륭하다), 어찌됐든 그들이 분한 배역은 현실적으로 매료되기 힘든 캐릭터인 사이코패스였다.

 

  <악마를 보았다>(2010, 김지운)에서도 ‘정말 나쁜 놈’이 등장하지만 그렇게 잔혹한 인물이 명배우인 최민식이었고, 그는 경이로울 만큼 순수한 악 그 자체를 잘 연기했다. 관객들은 그 사이코패스를 힐난하기보다 인간의 잔혹성에 대해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거나, 안전한 객석에서 스크린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호기심 가득 관망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아저씨>(2010, 이정범)에서는 매력적인 배우 원빈이 공권력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나쁜 것들’을 자경단으로서 ‘다소 거칠게, 그리고 불법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관객은 부조리한 현실적 공감과 함께 오락적이고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시대를 달리하고 공간을 달리해도 저런 ‘나쁜 놈’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줬다는 것이고, 네 편 모두 공권력이 극단의 범죄들을 직접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현실에서 언제든 내가 희생양이 될 수 있음에 공포심을 가지게 하고, 이 세상 모든 악에 대하여 공권력으로부터 완벽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음에 공분하게 한다. 나아가 저런 괴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이 사회라는 것에 묵시적 합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 사회에서 빛나고 있는 극소수 특별한 사람들의 권력이나 재력이 가진 이기적 영역이라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1971, 이하 <시계태엽>)와 밀로스 포만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이하 <뻐꾸기>)는 반세기 전의 영화이지만 ‘나쁜 놈’들은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 영화들과 정서가 닿아 있다. 차이라면, 앞의 영화들이 공권력의 무능 또는 무책임함을 보여준다면 이 영화들은 공권력의 흉포함을 말하고 있다.

 

  이 두 영화는 이질적인 쌍둥이처럼 다른 듯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시계태엽>의 알렉스(말콤맥도웰 분)와 <뻐꾸기>의 맥머피(잭 니콜슨 분)는 정말 ‘나쁜 놈’들이고, ‘더 나쁜 놈’들이 함께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나쁜 놈’의 차이와 ‘더 나쁜 놈’의 차이에 있다. 알렉스가 치가 떨릴 만큼 ‘나쁜 놈’이라면 맥머피는 꽤 유쾌한 ‘나쁜 놈’이다. 알렉스 주변의 ‘더 나쁜 놈’들은 온화한 가식을 덮었고, 맥머피의 ‘더 나쁜 놈’들은 천사의 이미지를 절대 권력으로 악용한다.

 

  <시계태엽>에서 알렉스는 강간과 폭력을 일삼는, 추호의 양심조차도 완벽하게 배제된 뼛속 깊이 사이코패스인 자로, 같은 인간이라기보다 스크린이라는 우리 안의 기괴한 생물체와 같아서 관객으로 하여금 신기한 듯 관찰하게 한다. 그에게 사이코패스는 건강하고 정상의 상태이다. 그래서 파블로프의 개처럼 약물로 세뇌 감화 치료를 받아 비굴해진 상태는 병에 걸린 것이 된다. 주목할 점은 알렉스가 일련의 생체 실험을 통하여 선한 인간으로의 갱생이 아닌 존엄성을 상실한 비굴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비굴한 인간으로 만든 자들은 인류공영에 그들의 능력을 이바지해야 할 탐욕스러운 정치인과 의사들이다. 또다시 공권력의 야심과 계략에 의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알렉스는 그 자신이 치료되었다고 말한다. 존엄성과 자유의지를 가진 애초의 사이코패스로 회귀했다는 것이다.

 

  <뻐꾸기>에서 맥머피도 ‘나쁜 놈’은 맞지만, 사이코패스보다는 제도에 반항하는 괴짜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분명 흉악범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감옥 대신 선택한 정신병원은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가진 그를 독립투사로 보이게 할 만큼 숨이 막히는 곳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자유의지는 허용되지 않는다. 정신병동을 관리하는 간호사는 언제나 준엄한 표정과 곧은 자세로 그녀의 원칙이 이 작은 세상의 법이라고 강요하며 그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참지 못한다. 이 이상한 왕국은 환자들을 말 잘 듣는 개, 돼지쯤으로 취급하고, 이러한 독재 시스템에 대항한 맥머피는 강제적인 과다약물 주사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다. 갱생과 치료의 의무를 가진 자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와 권한을 악용하여 거슬린다는 이유로 존엄성과 생명권을 박탈해버리는 것이다.

 

  철학으로부터 학문들이 분화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중반 제1차 산업혁명 즈음이었고, 심리학이 독립적인 학문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말부터였다. 양차 세계대전의 시기에 심리학이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는데,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참전할 병사들의 정신 상태와 심리상태를 미리 감별하는 것에 적극 활용되기도 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심리학계의 헤게모니는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관찰되는 과학으로서의 학문이었고, 따라서 파블로프의 개로 자주 인용되는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형성, 쏜다이크의 도구적 조건형성,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형성 등이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그 가운데 세뇌를 통한 감화치료법이나 약물처치법 등을 통해 죄수들의 갱생에 활용될 것을 전제한 다양한 실험이 횡행했고, <시계태엽>과 <뻐꾸기>에서는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일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이러한 실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서두에 언급한 영화들에서 관객은 공권력의 무능함에 갑갑증을 느끼지만, 이 두 영화에서는 공적인 위선자들에게 공포심과 무력감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나쁜 알렉스에게 안도감을 느끼고, 나쁜 맥머피에게 연민을 느낀다.

 

 

  ※ <시계태엽 오렌지>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통상 오렌지가 겉과 속이 다른 과일로 은유되고, 감아 놓은 태엽이 다 풀리면 시계가 멈춘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 약물에 의한 강제치료법은 원천적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인간의 속성은 변화되기 어렵다는 레토릭일 것이다.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뻐꾸기 둥지’는 서양에서 정신병원을 말하는 속어로, 극중 묘사되고 있는 정신병원의 이상한 체제에 반항하는 맥머피를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 본 내용 전체는 필자의 주관적 견해입니다.

 

글: 이민정=영화감독·대경대학교 공연예술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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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07 [14:15]  최종편집: ⓒ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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