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한석근
고운(孤雲)의 룡산정(龍山亭)
기사입력: 2018/11/23 [11:23]   울산여성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UWNEWS
▲ 한석근 前 울산시인협회장/수필가     ©UWNEWS

팔도강산의 아래지방에는 자연경관이 빼어난 세 곳이 있다. 가야산의 홍류동천, 지리산의 화계동천, 정족산의 운흥동천이다. 정족산은 영남알프스라 이르는 남녘의 울주군에 속한 신라고찰 운흥사가 자리했던 곳이다.

 

오래전부터 길지로 알려진 이 세곳 중 가야산 자락에 천년고찰 해인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골짜기에 일찍이 신라말기 최치원이 숨어들어 은둔의 삶을 살았다. 솔숲 우거진 홍류동(紅流洞) 골짜기에 농산정을 짖고 흐르는 물소리와 자연을 벗하며 지냈다. 세속의 번잡스러움을 털어내며 물소리에 귀를 씻고 마음을 달랬다. 계곡 물소리는 옆 사람과 이야기해도 들리지 않을 만큼 요란스럽다. 계곡 물소리는 신비한 효과가 있는 듯하다. 머릿속의 번뇌와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이곳에 와 보면 누구든지 마음속에 쌓인 화기를 풀어내고 우울증을 달랠 수 있다.

 

 농산정 앞에는 고운최선생둔세지(孤雲崔先生遯世地)라 새겨진 돌비석이 서 있다. 고운이 남긴 둔세시(遯世詩) 마지막 구절이 발길을 머물게 한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흐르는 물 시켜 산을 감 쌌네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세상사 속세에서 시비소리가 귀에 안 들리는 시대는 없을 것이다. 세차게 흐르는 계곡 물소리로 이를 씻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만 다를 뿐이다.

 

작은 바람 곁에도 일렁이는 나뭇잎은 고요를 훼방 놓는 물소리에 잎새를 흔든다. 골짜기를 걸으며 잠시 쉬려고 너럭바위에 걸터앉으려니 물소리가 뒷덜미를 잡아끈다. 힐끗 뒤돌아보니 많지 않은 계곡 물인데 하얗게 짐승의 이빨처럼 솟은 바위 사이를 휘돌아 흐르는 물소리가 그리 요란스럽다. 문득 해인사를 오르내리며 이 계곡 물소리를 읊은 시 한편이 생각난다.

 

 “콸콸 물소리 첩첩 산봉우리에 울려/지척에서 하는 말도 알아들을 수 없구나/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물소리로 온통 산을 둘러 싸게 했네.

 

가야산 독서당에서 읊은 시이다.

 

최치원은 세상이 싫어 어디로 갈까 헤매다가 자연 속 깊숙한 해인사 홍류동천에 농산정을 짓고 세상과 담을 쌓았다. 자연과 벗하기 이전에는 한동안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방황하기도 했다. 홍류동에 머물면서도 나들이 나온 곳이 해운대 동백섬과 황산강(낙동강) 기슭의 임경대(臨鏡臺)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강안의 풍광을 시로 읊었다.

 

“맷 부리 웅긋 종긋 강물은 출렁 출렁/집과 산이 맑은 물속에 서로 짝을 이루는데/바람 실은 돛단배 어디로 떠 가는가/새처럼 어느 곁에 자취없이 사라지네”

 

해운대 양산을 거쳐 물금에 이르러 오봉산 자락 강변의 누대에 올라 자적하게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며 시를 읊었다. 황산강(黃山江)은 문헌상 낙동강의 옛 이름인데, 신라 제2대왕(거서간) 때부터 이곳 나루에 제사를 지냈다. 황산이란 이름은 오봉산에서 철광의 누런 쇳물이 흘러들어 항시 벌겋게 강물이 혼탁해 붙여진 이름이다.

 

최치원은 산하를 풍미하며 가는 곳마다 시와 수필을 남겼다. 그의 문장의 특성이라면 문체가 다양하고 명확하게 표현한 이론과 굵은 스케일, 내용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공부 했으므로 신라의 전통적인 향가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형식미가 세련되어 문장이 아름답고 변려문체를 개척했다. 그 흔적은 ‘동서문’ 과 ‘계원필경’ 에서 엿볼 수 있다. 변려문의 특징이라면 문장의 구성방식이 4자와 6자를 기본 바탕으로 하여 미묘한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금슬 좋은 부부란 뜻으로 격식을 중시하고 상류 귀족이 좋아하는 문체를 뜻함이다.

 

최치원은 헌강왕 원년(857년) 신라 사부랑에서 출생했다. 열두 살의 나이에 당나라에 6년간 유학해 과거시험에 합격한 신동이다. 그의 아버지 최견일은 “만입 신 년 안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라 부르지 않겠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최치원 또한 졸음을 쫓으려고 공부할 때 허벅지를 가시로 찌를 만큼 열심히 해 시험에 합격한 뒤 낙양을 돌아보며 많은 시를 썼다. 이즈음에 쓴 격황소서(激黃巢書)란 글로 최치원은 더욱 유명해 졌다.

 

신라로 돌아 왔을 때는 29세 떼였다. 헌강왕은 높은 벼슬을 주었으나 끝내 야망을 채우지 못해 34살 때 지방 관리를 자청해 전북 태인(태산군), 함양(산청군), 서산(부성군) 태수를 전향 했다.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사랑하는 아들을 읽고 상심하며, 고을을 떠나면서 학사루 앞마당에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후 관직을 버리고 가야산 해인사로 찾아 들어서 농산정을 짖고 은둔했다.

 

훗날 고려 현종(1023년)은 최치원의 지대한 업적을 찬양하며 문창후란 벼슬에 추서하며 그의 학문을 기렸다.

둔세지지(遯世之地)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발길이 가벼웠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동
메인사진
[임영석 시인의 금주의 '詩'] 눅눅한 습성 / 최명선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인기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