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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근
이 방 인
기사입력: 2018/08/09 [17:35]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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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근 前 울산시인협회장/수필가     ©UWNEWS

지난 봄 바다를 떠돌던 예멘 500여명의 난민들이 제주도에 입국 했다. 이들을 두고 찬반이 대립하고 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는 마땅히 이들을 받아들여야 마땅핟다. 하지만 난민들을 내쫓는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일본, 중국,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지역 어느 나라도 쉽게 입국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예멘은 아라비아반도 남쪽에 위치하며 북쪽은 사우디아라비아, 동쪽으로는 오만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이다. 건조한 사막의 기후이지만 기온이 쾌적한 고원지대가 넓게 분포해 있으며, 비가 자주 내리는 곳도 있어서 살기가 주변 국가에 비해서 좋은 편이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아덴항을 중심으로 예멘은 고대로 부터 인류의 오랜 삶의 터전이 되어왔다. 그것은 유황, 몰약, 향신료 등의 무역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려왔다. 또한 모카 커피 생산시로도 유명하다. 예멘 모카 마타리 (Yemen Mocha Mattari)는 하와이의 코나,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과 함께 세계 3대 커피로 불릴만큼 맛이 좋다.


 아랍인의 군주국가이던 예멘이 남북이 서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다투다가 1990년 통일을 선언 했으나, 끝내 남북은 이념의 차이로 갈라섰다.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시아파반국(후티)은 수니파중심의 정부를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리고 있다. 또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알카에다’는 정부군을 상대로 테러 활동을 하고 있다. 이로써 예멘은 200만명의 난민을 발생시키며 오늘날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맞고 있어 어쩌면 분단국가인 우리의 현실과 다를바가 없는 처지이다. 그들의 내란과 우리의 6.25 동족상잔의 전쟁과 너무나 닮아서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제주에 난민이 상륙한 것은 처음이 아니고 이미 조선시대 부터 여러 차례 있었던 일이다.


 1627년 네델란드 상선을 타고 당시 식민지 였던 바타비아(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 동료 2명과 제주에 상륙했다.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만드는 일을 했다. 그의 이름은 벨테브레인데 조선인으로 귀화해 박연(朴燕)이란 이름을 얻고, 조선 여인과 결혼해 자녀도 낳았다. 동료 둘은 병자호란 때 전사 했다.


 순조 때인 (1801년) 여송국(呂宋國 : 필리핀) 사람 다섯이 표류하다 제주에 상륙했다는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처음에는 말도 필담도 통하지 못해 정체를 모르다가 1809년에야 알게된다. 문순득이 이들과 소통해 여송국인임을 알게된다. 그 후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문순득은 어물장수로 한동안 필리핀에 머물렀다가 돌아왔다. 그는 당시 신안군 일대의 홍어를 거래하던 어물 장수였다. 1801년 12월 일행 5명과 같이 흑산도 인근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던 길에 풍랑을 만나 유구국(瑜球國 : 오키나와) 까지 떠밀려갔다. 약 8개월간 이곳에 머물다가 조선으로 가려고 중국 배를 탔다가 다시 풍랑에 휩쓸려 필리핀 마닐라에 닿았다. 여기서 약 열달간 머물며 필리핀어를 익히고 이곳의 스페인 서양문물을 보고 듣게 되었다. 그 뒤 중국으로 가는 상선을 얻어 타고 마카오, 광동, 난징, 베이징(북경)을 거쳐 긴 여정을 거쳐 3년여만에 조선에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문순득은 다시 홍어를 거래하기 위해 흑산도에 갔다가 유배중인 정약전을 만나 자신이 여러 나라를 떠돌며 보고, 듣고, 느꼇던 것을 전해 주었다. 정약전은 이를 토대로 ‘표해시말’ 이란 표류기를 썼다. 문순득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낯선 이국의 언어를 배우고 그곳의 풍물을 눈에 익히고 마음속에 담아온 그 정신력과 집념이 가슴을 울리게 한다.


 또한 제주와 조선을 세계에 알린 하멜 일행이 있다. 1653년 8월 6일 제주목사 이원진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조정에 알린다.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니 38인이 살아있고 말이 통하지 않아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후일 이들은 박연에 위해 남만인(南蠻人)이라고 알려줬다. 당시의 남만인은 포르투칼, 스페인, 네덜란드 등 동아시아에 들어온 무역상 들이었다.


 수 백년 전부터 이렇듯 제주에는 여러 차례 외국인들이 입국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 가정이 100만을 넘고 있다. 인구 감소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궂이 찾아온 예멘 난민을 내치거나 박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내치면 비겁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면 만용이니 이럴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적인 입장이 필요하다, 도리켜보면 우린 뼈저리게 경험한 6.25 동란 때 16개국 참전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결코 안된다. 그보다 인도주의 차원에서라도 기필코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야 함이 현명한 선택이다.


 오래전 학창 때 읽은 꺄뮤의 ‘이방인’ 의 주인공의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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