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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근
역사가 깃든 판문점
기사입력: 2018/07/13 [17:3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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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근 前 울산시인협회장/수필가     ©UWNEWS

  지난 4월 27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전세계 외신기자들 2천여명의 취재경쟁이 판문점의 남측에 있는 ‘평화의 집’ 에서 치열하게 열기를 띈채 개최되었다. (북측에 있는 건물은 ‘판문각’ 이다.)

 

  어쩌면 애환이 서린 역사적인 현장인 ‘판문점(널문리)’ 이 다시금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니 그 역사가 깃든 이름의 유래를 쫒아가보자.

 

 ‘판문점’이란 지명 유래는 지금으로 부터 400여년전부터 시작되었다.

 

  1592년 4월 13일 아침 10만 대군을 앞세운 일본의 군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하려고 부산포로 밀려들었다. 그 후 제 1진의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제 2진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왕이 있는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군한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는 조선이 자랑하는 명장 신립 장군에게 문경새재에서 적을 방어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신립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난공불락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남한강 탄금대의 넓은 강벌로 적을 유인해 섬멸하려고 작전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패하여 물거품처럼 사라지게되고 조선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채 대패하고 말았다. 넓은 강변에서 기마병을 필두로 빠르게 움직이며 활로 제압해보려 했던 신립장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버리고만 것이다. 이유인 즉슨 전투를 벌이던 그전날밤에 비가 내려 강변의 모래가 수분을 머금어서 말발굽에 갯벌이 달라붙어 말이 자유롭게 달릴수가 없었던것이었다. 또한 화살보다 빠른 일본의 조총앞에서 기동력을 잃은 기마병부대의 활은 무용지물이었다.

 

  조선의 대군을 거느린 명장 신립이 전사하자 의기충천한 일본군은 거침없이 내달렸다. 신립 장군이 전사했다는 급보를 접한 선조는 지체없이 파천(播遷) 을 결정하고 길떠날 준비를 서둘러 장대같이 쏟아지는 새벽 빗길 속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왕의 피신은 처음부터 고생길이었다. 길은 한양에서 파주, 개성, 평양을 거쳐 압록강 부근의 의주로 이어졌다. 이 피난길이 훗날 ‘의주 피난길’ 이라 했다.

 

  선조는 한양의 궁궐과 도성을 버리고 뒤돌아 볼 여력도 없이 벽제를 거쳐 곧 임진강나루에 이르렀다. 하지만 칠흑같은 어둠속에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행령은 갈팡질팡 어쩔줄 몰라 허둥대었다. 강을 건널 배는 없었고, 또한 어느 지점에서 반대편의 어느 지점으로 강을 건나야할지도 몰랐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신하들이 주변에 있던 목재(집을 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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