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오피니언
한석근
청어 관목어(貫目魚)를 기다리며
기사입력: 2018/03/15 [12:33]   울산여성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UWNEWS
▲ 한석근 전 울산시인협회장/수필가     ©UWNEWS

청어는 등 푸른 생선 가운데 손꼽히는 생선이다. 서민 밥상에 가장 많이 오르는 것이 고등어이고 그 다음으로 청어, 정어리, 전어, 숭어, 전갱이(아지) 등속이 모두 등 푸른 생선에 속한다.

 
아침저녁 밥상에 오르던 비교적 값이 싼 이들 생선들은 지금은 귀한 대접을 받은 생선으로 바뀌었다. 고등어, 전어, 숭어, 황어를 제외한 청어와 정어리, 꽁치(삼마)는 우리 바다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나마 명맥을 잇고 있는 전어, 숭어, 황어도 어획량이 줄어 수산 시장에서도 고가로 거래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서민의 생선이라 불리던 그렇게 흔한 고등어도 값이 두 배가 뛰었다. 쉽게 밥상에 올리던 고등어도 손쉽게 장바구니에 담을 수 없게 되어간다. 이는 철저한 어족 보존 규정을 지키지 않고 마구잡이로 한 남획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일찍부터 일본은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정해진 법령에 따라 조업을 하지만 우리나라 어선들은 지금까지는 잘 지키지 않았다. 더욱이 중국 어선들이 떼거리로 밀려와 싹쓸이를 해 가는 불법 어로 행위 때문에 어족이 현저히 줄어들어 점차 어종마다 희귀성을 띄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다간 머지않아서 그 흔한 고등어마저 멸종에 이르게 되고, 우리 바다에서 잡은 생선이 밥상에 오르기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어족이 사라진 바다는 곧 죽음의 바다이고 인류를 멸망에 이르는 기아상태로 몰아갈 것이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렇기에 어족 보호와 사라진 어종 복원은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 100여 년 전에는 그린란드와 노르웨이는 대구 잡이로 양국 간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도 인도양 참치 잡이 원양 어선들은 서로 많이 잡으려고 생사를 걸고 투망 경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 바다에서 사라진 청어는 조기, 명태와 더불어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이 잡혔던 어종이다. 시대를 가릴 것 없이 시기별로 한반도 해역 이곳저곳에서 잡았다. 19세기 중엽에는 서해 청어 밀무역 사건이 일어났다. 풍천, 장연 경계에서 조선의 배들이 청나라 배에 청어를 팔았다. 불법이었다. ‘임하일기’에 풍천은 지금이 송화다. 옹진반도 위 쯤 되는 바다이다. 청나라 문종(文宗 1831~1861) 무렵이다.

 
조선 정부에서 청어 밀무역을 문제 삼았던 것은 세금 때문이었다. 청어는 많이 잡히는 생선이었다. 많이 잡히니 셈하는 단위도 컸다. 청어 1동은 2천 마리이다. 조정에서는 생청어(生靑魚) 혹은 건청어(乾靑魚)를 세금으로 받기도 했다. 이와 같이 생선이 밀무역 대상이 되었을 때는 정부로서는 눈감기가 힘들었다.

 
당시 청어 잡이 방식은 크게 세 가지였다. 큰 그물을 치고 시간이 제법 지난 후에 그물을 걷어 올리는 것인데 밀물 썰물 물 때 따라 회유하던 청어가 걸려든다. 어조(漁條)는 배에서 그물을 던지고 즉시 그물을 당겨 고기를 건져 올리는 방법이다. 방렴(防簾)은 긴 나무 막대기를 촘촘히 물속에 박아서 갇힌 물고기를 잡는 죽방(竹防) 형식이다.

 
하지만 방렴 방식은 폐해가 많았다. 함경도 방렴은 1770년경 영남에서 전래되었다. 20년이 지나자 원산 일대에만 190곳으로 늘어났다. 인근 지역도 마찬가지여서 청어 어획량은 급격히 감소되었다. 과격한 세금 때문에 파산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반면 방렴에 청어가 많이 잡히도록 굿을 벌이고 굿을 위해 소를 불법 도살하는 엉뚱한 일도 벌어졌다. 함경북도 암행어사가 균역청과 협의하여 방렴을 없애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는 정도 때 일성록이 있기도 하다.

 
청어는 널리 쓰였고 왕실의 제사를 비롯한 청어죽을 꿇여 먹기도 하고, 구워 먹기도 했다. 고려 말 연해 출신 이색은 “쌀 한 말에 청어가 스무 마리 남짓으로 비싸다. 아침 밥상에서 청어를 먹는다. 청어가 인간 장기에 기운을 가득 차게 한다.”고 ‘목은시고’에 적었다.

 
교산 허균은 청어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청어는 네 종류가 있다. 북도(함경)에서 나는 것은 크고 배가 희고, 경상도에서 잡히는 것은 등이 검고 배가 붉다. 호남에서 잡히는 것은 조금 작고, 해주(황해도)에서 2월에 잡히는 것은 맛이 매우 좋다. 명종 이전만 해도 쌀 한 말에 50마리였는데 지금은 전혀 잡히지 않으니 괴이하다.”고 ‘성소부부고: 도문대작’에 기록했다.

 
청어는 고기 살이 물러 쉬 상하므로 대다수 건청어 즉, 관목어(貫目魚)로 유통되었다. 오주 이규경이 말린 청어는 ‘관목어’라고 칭했다. “연기가 통하는 부엌 천장에 청어를 매달아 두면 연청어(煙靑魚)가 된다.”고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했다. 빙허각 이 씨의 ‘규합총서’에서는 “청어의 두 눈이 말갛게 서로 비칠 정도가 되는 신선한 것을 ‘관목’이라고 한다. 청어 2천 마리에서 관목 한 마리를 얻을 만큼 귀하다.”고 했다. 오늘날 과메기가 ‘관목’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당시 조선 선비들 간에는 청어는 비유어(肥儒魚)라고도 불렀다. 가난한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같이 국민들이 즐겨먹던 청어는 이제 우리 연안에서 사라지고 없다. 그렇다면 이런 국민적 생선의 고갈을 그냥 두고만 있을 일은 아니지 않는가 싶다.

 
십 여 년 전 선진지 꽃 견학을 네덜란드에 갔다. 짬을 내어 그 곳 북해와 마주한 잔드브르트(Zand Voort) 해변 에리스 백(Elysee, Beach) 해수장에 갔더니 밤 새워 파티를 했다. 드럼통에 장작불을 피우고 숯불에 청어를 구워 즉석에서 연인끼리, 노소 구분 없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도 2길더(한화 2500원)을 주고 한 마리씩 구이를 손에 들고 먹었다. 청어는 동서양 가리지 않고 모두가 즐겨먹는 대중적 생선이다.

 
지난 해 다행스럽게도 수산청에서 우리 바다에서 멸종된 명태를 인공수정에 성공하여 속초 앞바다에 치어를 방류했다니 늦기 전에 청어도 복원해 볼 수는 없는지 묻고 싶다. 아마도 머잖아서 청어, 정어리도 우리 울산앞바다에서 잡히리라 기대하면서 밥상 위에 다시 청어관목어(과메기)구이가 오르기를 기대해본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동
메인사진
[임영석 시인의 금주의 '詩'] 눅눅한 습성 / 최명선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인기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