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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도
사랑의 무게
기사입력: 2017/10/26 [12:01]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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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도 건영화학대표/ 국제PEN문학회원     ©UWNEWS

 옛날 일제시대 시인 백석이 있었다. 그는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외모로 길을 가던 여성들이 한번쯤은 되돌아 보게 되는 뛰어난 상남자 였다.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무렵인 1936년 경에 회식자리에 나갔다가 기생 김영한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이 잘생긴 로맨티스트 시인은 그녀의 옆자리에 붙어 앉아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 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기 전 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 라며 사랑을 고백했다.


백석은 이백의 시구에 나오는 ‘자야(子夜) 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 주며, 그렇게 두사람은 비극적인 사랑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들 사랑의 행로가 그다지 쉬울 리가 없었다. 당대 최고의 직장인 영생여고 영어 선생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그 반대가 여간치 않아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 두사람을 갈라 놓으려 했다. 결혼 첫날밤에 백석은 연인 자야(子夜) 에게로 찾아가서 만주로 도망가기를 제안했다.


그렇지만 자야는 백석의 장래에 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염려로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백석은 자야가 자신을 찾아 바로 만주로 올것을 확신하며 먼저 만주로 도망길에 오른다. 만주에서 홀로된 백석은 자야를 그리워하며 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를 지어 남기게 된다.


그러나 잠시동안 이라 믿었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해방이 되고 백석은 함흥으로 자야를 찾아갔으나, 그녀는 이미 서울로 떠난 다음이 되고 말았다. 그 후 3.8선이 그어지고 6.25 동란이 일어나고 평생 자야를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가 북에서 1996년 에 한많은 여생을 마감한다.


남한에 혼자 남겨진 자야(김영한)은 대한민국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을 세워 엄청난 재력가로 성장했다. 훗날 자야는 당시 시가로 1000억원 상당의 대원각을 조건없이 무소유의 저자 법정스님에게 시주를 하고 만다. 그 대원각이 바로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吉祥社)’이다.

 

한평생 백석을 그리워 하며 살았던 자야는 폐암으로 1999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기전 “천억 상당의 재산을 기부 했는데 아깝지 않냐?” 라는 기자의 질문에 자야는 “1000억 재산이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 라고 쓸쓸하게 대답했다.


한국판 로미오 와 줄리엣 이라 하지만, 그 보다 몇 십배로 진한 감동이, 위의 얘기를 덮을즈음 가슴이 아려온다. 요즈음 세상은 사랑도 돈을 따라가고 마는데 일 평생 번 재산을 ‘그 사람의 시 한편’ 보다 못하다고 평한 자야의 영혼은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야기인데,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를 천억의 가치가 되나 싶어 몇 번씩이나 읽어 봤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그들의 ‘사랑의 무게’ 로 저울질한 사랑의 값어치 였다.

 

사랑의 값어치는 한도가 없음을 뒤늦게 알게 되어 다행이라 여기면서,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 가 갑자기 떠오르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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