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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울산 소금 이야기 (7)
기사입력: 2016/10/24 [09:01]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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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WNEWS

 

<울산 소금의 유통>

 

길 위의 소금장수

길 위를 떠도는 소금장수들의 삶은 고단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튼실한 두 발뿐인 소금장수들은 한 냥을 보고 짐승 우짖는 산을 주기살기로 넘었다.

 

쇠덩이와 다름없는 무거운 소금가마니를 지고 하루에 수십 킬로 씩 걸어야 하는 소금길은 혹독했다. 길조차 평탄한 것이 아니라 가파른 길 자드락길을 구슬땀을 흘리며 올라야 했다. 붙여먹을 땅뙈기 한 평만 있어도 나서지 않는다는 소금장수들은 고달픈 길에서 무뢰배를 만나 물목을 빼앗기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를 하였다.

 

▲   그림. 1930년대 울산소금장수의 모습. 사진 제공 장세동  © UWNEWS

 

소금 가마니를 진 울산 소금장수들은 밀양 청도로, 상북 고헌산 중턱 외항재를 넘어 경주 · 산내 · 건천 · 경산 · 하양 · 대구 · 문경새재로, 범서 곡연에서 북쪽 계곡의 옹태 한실 반구를 거쳐 경주 · 안동 · 죽령을 넘었다.

 

우마에 소금을 지운 소금상단들은 내황 · 호계 · 모화를 거쳐 경주 · 영천 말죽거리로 갔다. 그래서 죽령 이남 사람치고 울산소금 안 먹어본 사람 없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왕의 소금행차

신라 49대 왕 헌강왕(재위 875~886)은 울산 개운포에 소금행차를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통해 신라 헌강왕이 울산으로 향한 길은 경주, 모화, 석계, 관문(현 울주군 범서읍), 척과, 서사, 다전, 굴화, 율리에 이르는 길이거나, 경주, 모화, 중산, 신천, 호계, 화봉, 동동, 남외동, 반구동, 학성동에 이르러 태화강을 도강했을 가능성이 크다.

 

개운포는 헌강왕이 처용을 만난 설화가 있는 곳이다. 처용설화 길은 외황강을 거슬러 올라 마채염전, 영축산 망해사로 이어지는데, 망해사는 신라 헌강왕(재위 875~886) 때 동해의 용을 위해 세운 절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울산부(蔚山府) 소금길

울산 중심지인 울산부는 부산항으로부터 130리, 경주 100리, 정기선 귀항지인 장생포로부터 20리로, 자동차와 마차, 배편이 있었다. 부내 각 요지에 이르는 중심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평야지대인 언양과 경주의 미곡화물은 모두 이곳에 모였다 흩어지므로 시장은 매우 번성하며 음력 5일 10일에 장이 섰다. 1905년 러일전쟁 이전부터 일본인의 내왕이 적지 않았다.

 

▲  그림. 소금장수들이 지나갔던 1960년 태화강 전경(현 십리대밭교 부근). 사진 제공 울산박물관   © UWNEWS

 

지금은 신도시로 변한 삼산은 옛날에는 삼면이 모두 갯벌로 바다호수를 낀 염전이 있었다. 태화강 대부둑은 소금을 실은 소달구지와 다섯 말 소금자루를 지게에 진 소금장수들이 각처로 나갔던 길이다.

 

범서-반천-언양 방향, 삼동-신평-통도사 방향, 덕하-남창-해운대-부산 방향, 삼산 태화나루-학성공원-울산장 방향, 내황-동천강 거랑-호계-모화-불국사-경주 방향 등이었다.

 

소금장수들은 쥐 같이 생긴 북구 신천동 주무불 고개 등 480개의 울산고개를 죽기 살기로 넘었고, 서사 물시불 주막 등 107개 주막에서 목을 축였다.

 

소금장수들이 쉬어가던 주막으로는 범서 천상 새고개 주막, 솔고개 주막, 내와리 바데주막, 복안 중간지점 중점 주막, 중점 서말치 솥 만들던 솥점 주막, 삼남 깊으내 주막, 반송주막, 반천 천소주막, 고하주막, 빈곡 지경주막, 옥동주막, 중남 수남주막, 덕천주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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