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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울산 소금 이야기 (5)
기사입력: 2016/08/11 [17:22]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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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염포 일대. 사진 제공 울산북구예술창작소  © UWNEWS

 

<하상면 명촌대도섬 염전>

   

모래의 땅, 대도섬

행정구역상 울산광역시 태화강 한가운데 떠 있었던 모래섬 대도섬(大島)은 ‘크다’는 뜻의 ‘한섬’이라고도 불렸다. 정확한 위치는 경도 129-22-30, 위도 35-32-20의 좌표상에 있었고, 울산광역시 북구 명촌동 30번지에 속했다. 명촌 논둑에서 동남쪽으로 보통 청년들이 헤엄을 쳐 건널 수 있는 50여 미터 떨어진 지척지지(咫尺之地)의 거리였다. 현재 현대자동차 주행시험장의 남서쪽 맞은편에 있는 돋질산과 태화강의 동안(東岸)의 중간 지점이고, 국유지(건설교통부)였으며 지목은 하천이다. 1911년 1월 경상남도 울산군 하부면 대도동(大島洞)이었다가 명촌동에 편입되었다.

    

돋질염전, 마채염전, 명촌대도섬염전은 해방 후에도 소금을 생산했다가 울산공업단지에 편입되면서 철거되었는데, 마채염전과 돋질염전은 1965년 경, 명촌대도섬염전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폐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은 정부로부터 1967년 12월 허가를 받아 1968년 10월에 준공이 되었다. 

    

    

<염포 소금포>

      

소금을 굽던 염포, 무역항 소금포  

염포는 소금의 생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염포에 대한 눈 여겨 볼만한 기록 중에는 세종 때 간행된 『경상도지리지』 울산군 염분조에 나오는 기록이 있다.

    

燔鹽盆 八十九坐 內在道鹽盆場官道 屬貢鹽盆八十二坐 開雲浦萬戶道軍須鹽盆二坐 西生浦道萬戶軍須鹽盆坐 鹽浦萬戶道軍須鹽盆三坐

    

구운염분 89좌 가운데 82좌는 도염장관에 속한 정역호인 염한들이 공납하였고, 나머지 7좌는 개운포만호의 도군수가 2좌, 서생포만호의 도군수가 2좌, 염포만호의 도군수가 3좌를 공납하였다.

    

즉, 울산지역에서 생산되는 자염 89좌 중에 염포 수군이 3좌를 관영염분으로 생산하였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鹽浦萬戶道軍須塩盆三坐’ 즉, 염포만호의 도군수 염분 세 자리는 조선 초기까지 염포에서 소금을 생산해 내었다는 귀중한 기록이다. 그러나 염포의 소금역사는 더 이상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염포가 모래성분이 없는 갯벌지대로 환경변화가 나타나면서 자염을 생산하기에 부적합하게 되었고, 따라서 소금생산은 중단되고 소금 관리지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

    

울산은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드문 ‘염포’라는 지명을 가졌다. 울산대교 공사를 하면서 염포 성내 일대에 2008년 지층조사를 한 결과에도 나타났듯이 염포는 갯벌지층이라 자염을 생산하기에는 어려운 곳이다. 따라서 염포는 일찍이 울산에서 시작된 자염 생산 지역이었다가 염포수군만호와 함께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염포라는 지명이 존재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소금을 보관했던 창고였거나 울산이 소금교역으로 손꼽혔기 때문에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울산 염포가 신라시대 이전부터 소금을 구웠던 곳이라는 주장도 있다. 진한 24국 중에서 ‘염해국’이 바로 울산 태화강과 돋질, 염포동 일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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