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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재개발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기사입력: 2009/04/17 [13:3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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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주 민중문화정책연구원장
▲     박삼주
라일락 꽃 피는 희망의 계절 4월의 중순에, 용산 철거민 참사가 100일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 커녕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살인진압의 책임자는 무죄, 희생자는 유죄’라는 희대의 사기극이 벌어져 고인의 명예가 훼손되고 유가족의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고 이상림씨를 비롯한 희생자들은 하루아침에 빼앗긴 주소지를 들고 평지에서는 오갈 곳이 없어 하늘로 망루를 쌓고 올라갔다가 아예 저 하늘로 밀려올라갔다.

 그렇다. 이 땅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가진 게 없는 자들은 어차피 이방인들일 뿐이였다. 민들레 홀씨처럼 조그만 짐 보따리들을 이고지고 평생을 떠돌다 끝내 정주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이 지구에 잠시 세 들어 사는 사람들. 어떤 시인처럼 이 세상에 잠시 소풍 왔다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이라도 편할까.

 철거는 단지 집이나 가게를 빼앗는 것이 아니다. 철거는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다. 먼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삶의 기본적인 평화를 갈구했던 가난한 마음과 의지를 철거시킨다. 이 사회에 대한 믿음을 철거시킨다. 다음으로는 관계를 철거한다. 십년, 이십년 가꾸어온 삶의 공동체, 이웃들과의 관계를, 세계와의 관계를 철거한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에게서 물을 빼앗는 것과 같은 잔인한 일이다. 나무를 흙에서 뽑아내어 따로 살라는 황당한 말과 같다. 아이들에게서 친구를 빼앗는 것이며, 낯익고 친숙한 모든 풍경으로부터 소외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내용적으로 그것은 삶의 죽음이다.

 그 대가로 얼마의 보상금을 주었다고 하지만 그런 유무형의 삶의 가치들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런 뼈아픈 배재 과정에서 생겨난 아픔과 절망들이 극한의 선택을 하게 만든다. 평생 경찰서 구경한 번 안 해본 선량한 철거민들이 갑자기 투사가 되어 화염병을 만들어 망루로 오르는 것은 그런 절망감 때문이다.

 개에게 쫓긴 선량한 닭들이 퇴화된 날개를 퍼덕이며 온갖 힘을 다해 지붕 위로 날아오르듯 그들은 험악한 용역깡패들을 피해 망루로 올랐을 뿐이다. 누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렇게 외로운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호소하려고 올랐을 뿐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게 강제철거를 집행하는 나라로 꼽히는 한국정부에 유엔의 “대책 없는 강제철거를 금지하라”는 권고를 무시한 비인도적인 강제철거관행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대중들의 상대적인 무관심과 방관자적인 자세, 그리고 그것을 부채질하는 권력과 언론의 비인간성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어 최후의 수단으로 망루에 올랐을 뿐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개발해줄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무엇을 보상해줄 수 있단 말인가. 원래 살고 있던 거주자의 85% 이상을 그 지역에서 영구히 배제하는 재개발이라면 그건 누구를 위한 것인가. 50층짜리 매머드 복합상가가 들어서는 현대판 재개발의 대부분은 이런 공동체의 무덤 위에 세워진 학살의 증표일 뿐이다. 이윤만이 목적인 기업과 정권은 우리 삶의 모든 국면들을 분절해 상품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오만은 정신병일 뿐이다. 어떤 살인자보다 더 파괴적이고 집단적이며 폭력적이고 계획적인 타살 음모일 뿐이다. 용산철거민들은 그런 우리 사회의 오만과 폭력에 의해 계획적으로 살해되었다. 100일이 넘도록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는 고인들의 명복을 빌면서, 검찰수사를 무효화하고 전면재조사하는 것만이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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